
김 훈
2000년 2월 14일
일기도 인젠 별로 쓸것이 없다. 그렇다고 처녀시절부터 써온 일기를 끊을수도 없고.
오늘은 련인절이다. 련인절이라고 하지만 날씨는 내 마음처럼 흐렸다. 나이 40고개를 넘긴 사람이 련인절을 실감한다는게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어느 날보다 더 서글퍼지는게 이상하다.
련인절도 모르고 흘러보낸 청춘이 서글퍼서일가 아니면 장미꽃을 들고 다니는 청춘들의 모습에 시샘이 나서일까…
집에 들어서면 오늘도 적막강산이다. 어깨가 축처진 외로운 내 그림자만 끌고 집에 들어서니 날 맞아준건 출근하면서 치우지 않은 아침상이다. 이 량반 또 점심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보나마나 로인활동실에 가서 마작을 주무르면서 빵 하나에 음료수 한병으로 점심을 에때운것 같다. 퇴직도 안한 사람이 왜 로인들 축에 끼는지…
장미꽃 한송이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온 내 인생 가엾기만 하다. 저녁밥 휘딱 먹고 또 어델 나가려는걸 불러세운 것이 이제보면 잘못이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세요?》
《14일이지.》
《14일이 무슨 날이에요?》
《누구 생일인가?》
할말이 없다. 그래도 한때는 글깨나 쓰면서 문학이 어떻고 인간이 어떻고 하던 사람이 련인절도 모르다니 사람 웃긴다.
내가 왜 오늘따라 감상적일까, 그만두자. 자학적인 기분만 드니까. 어서 삭막한 이 공간 벗어나야지. 다른 한 삶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사막의 오아시스: 미안해요. 기다리게 해서. 방주님.
노아의 방주: 좀은 기다렸습니다. 오늘따라
사막의 오아시스: 왜죠?
노아의 방주: 오늘은 좀은 특별한 날이여서.
사막의 오아시스: 우리에게도 특별한 날인가요?
노아의 방주: 당연하죠. 오늘은 우리의 명절 밸런파인데이!
사막의 오아시스: 밸런파인데이?
노아의 방주: 련인절을 밸런파인데이라고도 합니다. 축복드리 고 싶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고마워요.
노아의 방주: 자 그럼 촛불을 켜겠습니다. 음악은 뭘로 할가 요? 외국 음악?
사막의 오아시스: 그래도 전 연변음악이 좋아요. 김지엽이 부 른 《타향의 달밤》.
노아의 방주: 하필이면 《타향의 달밤》입니까? 련인절 분위 기에 맞는 노래들이 많지 않습니까? 례하면 《오늘만 너 하고 나 둘만》이라던가 《사랑이 머무는 날》이라던가…
사막의 오아시스: 전 언제나 타향에 머물면서 고향을 그리듯 이 마냥 뭔가 그리는 기분이거든요.
노아의 방주: 그럼 《타향의 달밤》이 오늘의 분위기 음악입
니다. 음악이 울립니다. 듣고 계시죠?
사막의 오아시스: 네.
노아의 방주: 변변치 않은 선물이지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 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뭔가요?
노아의 방주: 장미꽃 한송이만 마련했습니다. 《백년해로》란 뜻에서 백송이를 선물하려다가 《백년해로》라는건 너무 많이 들어온 말이고 또 로인들이나 하는 소리같아서 그만 두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그럼 한송이는요?
노아의 방주: 오직 너 하나만이!
사막의 오아시스: 고마워요…
노아의 방주: 술 한잔 붓겠습니다. 영원할 오늘을 위하여!
……
……
노아의 방주: 잔 들지않고 지금 뭘하시는겁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울고싶은 마음이얘요…
노아의 방주: 오늘은 모든 번뇌를 다 버리고 둘만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기분 내야지 않습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잔을 들겠어요. 삶의 이 공간을 위하여, 그 리고 이 공간을 마련해준 방주님에게 언제나 행운만 가득 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자!
노아의 방주: 화제를 바꿔볼까요?
사막의 오아시스: 그러죠.
노아의 방주: 좀은 재미나는 이야긴데 신문에서 봤습니다. 부 부로 만나 살아가면서 시기시기 상대방에 대한 평가가 다 르답니다. 례하면 처음 만났을 때의 평가가 다르고 련애 할 때가 다르고 결혼후에 다르고 또 결혼후 10년이 다 르고…
사막의 오아시스: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네요.
노아의 방주: 남자가 녀자에 대한 평갑니다. 첫 만남에서 련 애상대자에게 내린 평가는 《정말 이쁩니다. 꿀벌도 꽃인 가 착각하고 날아들겠습니다.》 련애를 시작하면 《행복의 녀신, 미의 천사여!》 이런 평가가 내려지고 결혼후 1년이 면 《뭐나 다 좋은데 가끔가다 앵돌아지는게 흠이야》, 결 혼후 5년이면 《바가지를 긁을줄밖에 모르는 녀자》, 결혼 후 10년이면 《이런 녀잘줄 내가 몰랐어. 내가 눈이 멀었 지》, 결혼후 20년이면 《성깔부려 그렇지 그래도 가정은 잘 지키는 녀자야》, 결혼 30년이면 《마누라 없인 난 못살 아》, 상처한후에는 《세상에서 둘도없는 녀자야,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이렇게 탄식한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재미있는 얘긴데요.
노아의 방주: 남자에 대한 녀자들의 평가도 역시 시기시기에 다를것이라고 봅니다. 남자에 대한 평가 한 번 내려보시 지요?
사막의 오아시스: 여태껏 남자 한사람밖에 모르고 살아왔으 니 평가를 내릴수 없군요.
노아의 방주: 그 사람에 대한 평가라도?
사막의 오아시스: 평가하고싶은 생각 꼬물만치도 없어요.
노아의 방주: 미안합니다. 별로 아픈 상처 건드린 것 같군요. 자. 그럼 우리 자리를 옮겨볼까요? 노래방 어떨가요?
사막의 오아시스: 오늘 그 어디에 가봤댔자 죄다 젊은이들의 세상이겠으니 그냥 산책이나 하지요.
노아의 방주: 밸런파인데이 밤, 련인하고 함께 걷는 밤거리, 오늘따라 명멸하는 불빛도 축복의 꽃보라로 보이는군요.
사막의 오아시스: 오래만에 별을 보는군요. 하늘의 별을 쳐다 볼 여유도 없이 살아온 인생 비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드 네요.
노아의 방주: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그러니 가끔씩은 하늘을 쳐다볼 여유를 가지십시오. 그러 면 달도 따고 별도 따고, 노래마따나 뽕도 따고 님도 따 고 하하하…
사막의 오아시스: 호호호…
노아의 방주: 노래 부르고 싶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무슨 노래를요?
노아의 방주: 《모스크바 교외의 밤》
사막의 오아시스: 저의 18번이얘요.
노아의 방주: 그렇습니까. 역시 저의 18번입니다. 《깊이 잠든 화원은 고요해》
사막의 오아시스: 《산들바람 속삭이네》
노아의 방주: 《아름다워라 이 맘 이끄는》
사막의 오아시스: 《황홀한 이 밤이여》
노아의 방주: 별로 20년전으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저도 그래요. 그 때의 그 기분으로 그냥 살 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노아의 방주: 그 기분을 다시 살리는겁니다. 20년전 《개구리 합창단》이 합창하는 논판에서 밝은 달이 뿌려주는 은가 루를 한몸에 받으며 걷던 논뚝길…
사막의 오아시스: 방주님도 그 때 농촌에 있었나요?
노아의 방주: 《광활한 천지엔 할 일이 많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식청년이셨군요. 전 귀향청년이였어요.
노아의 방주: 천생배필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
노아의 방주: 점 세 개는 무슨 뜻입니까?
사막의 오아시스: 아이참 것도 몰라요? 전 인젠 나갈께요. 주 말에 다시 만나요. 8282!
노아의 방주: 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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