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0-13 18:00:47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10월 14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두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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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0월 14일은 중양절입니다.

중양절은 해마다 음력 9월 9일, 중국에서 행하는 전통적인 명절입니다.

9는 원래 양수이며, 양수가 겹쳤다는 뜻으로 중양이라고 합니다.

이때는 한해의 수확을 마무리하여 먹을거리가 풍성한 계절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이때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먹군 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10월 14일은 또 세계 표준의 날입니다.  세계 표준의 날은 국제표준화기구, 국제전기기술위원회, 국제전기통신연합 3대 표준화기구가 국가 표준의 중요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제정한 날입니다.

지난 10월 1일은 중국 국경절인데요, 1일부터 7일까지는 국경 연휴였습니다.

국경절 중국 국내 관광객 수는 5억명을 넘었고 관광소득은 거의 4천억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간주]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씨 마을의 머리가 소실된 옛 석상

  나무 수(樹)는 박씨의 항렬 돌림자에 나무처럼 박혀 있었다. 박씨들에게 전하는 항렬 돌림자는 도합 20자, 박수붕(朴樹鵬)은 열한 번째의 돌림자를 쓰고 있었다. 박씨 마을의 생존자 항렬에서 제일 윗세대라고 한다. 박씨는 현재 뛰어날 걸(杰) 돌림자의 제14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박수붕은 53세에 벌써 증손자를 두고 있는 격이었다.

  “한 세대를 25년이라고 치면 우리는 이 마을에서 3백 년을 살고 있은 셈이지요.”

  박수붕의 고향은 박가원(朴家院)이었다. 박가원은 장성 기슭의 하북성(河北省) 승덕시(承德市) 평천현(平泉縣) 당패진(黨壩鎭)에 위치한다. 박가원의 이름 뜻대로 따른다면 박씨네 뜰에는 현재 30여 가구, 160여명의 박씨가 살고 있고 한다.

  박씨의 선인(先人)은 장성 밖의 심양(沈陽) 일대에서 순치(順治, 1638~1661) 황제의 말잡이로 있었다고 박수붕이 선조로부터 내려온 옛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 황제의 은혜를 받아 박가원에서 마을 우두머리인 장두(庄頭)로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박씨 가족이 구전하는 이 이야기처럼 강희(康熙) 8년(1669), 황제는 전공을 세운 부하 12명을 장성 밖에 정착하게 했다고 괴뢰정부 만주국(滿洲國) 시기의 《열하성각현상황(熱河省各縣情況)》이 기록한다. 이에 따르면 그들은 황제의 칙지를 받들어 이 지역에서 말을 달려 땅을 정했는데, 하루 동안 한 바퀴의 말을 달린 그 땅을 그들의 소유로 삼았다.

  박가원에 정착한 첫 박씨는 항렬 돌림자가 높을 존(尊)이었다고 박수붕이 밝힌다. 20자의 항렬 돌림자를 따른다면 박씨의 이 선인은 박씨 가족의 제4대이다. 훗날 박씨는 또 박가원에서 부근의 노장자(老杖子), 교상(窖上), 하영방(下營房)으로 지파(支派)를 만들었다. 그러나 모두 박가원에서 전승한 20자의 항렬 돌림자를 쓰고 있

  “20자를 전부 마치면 그때부터 이 돌림자를 첫 글자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지요.”

  박씨의 다른 한 집거지인 평천현 칠구향(七溝鄕) 박장자(朴杖子)가 이 20자 돌림자의 진원지로 되고 있다. 박가원의 박씨는 시초에 박장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름만 들으면 서로 고향이 다르고 면목이 몰라도 금방 상대방의 항렬을 알 수 있다.

  박장자는 박가원에서 북쪽으로 약 20리 떨어져 있는데, 박씨가 말뚝을 박아 땅 지경을 삼은 곳이라는 뜻이다. 박가원처럼 황제의 은혜를 받아 박씨가 박장자의 장두로 되었으며, 박가원처럼 박장자의 박씨도 이주하여 또 다른 동네를 이뤘다. 박장자 부근의 석호구문(石壺溝門)이나 승덕현(承德縣) 상곡향(上谷鄕) 양장자(良杖子) 등의 박씨 가족은 박장자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박장자나 박가원의 박씨처럼 모두 20자의 항렬 돌림자를 쓰고 있단다.

  박장자의 박씨 선인은 시초에는 장성 밖의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 부근에서 살았다고 한다. 석호구문의 박길창(朴吉昌, 당시 82세)은 그들의 선인이 한왕(罕王)의 호위병으로 있었으며 명(明)나라의 항복한 장령 오삼계(吳三桂)가 장성 관문을 열었을 때 청군(淸軍)을 따라 관내에 진출했다고 구술하고 있었다. 1988년 여름, 현지를 답사했던 연변의 민속학자 천수산(千壽山)이 그의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구술자인 박길창이나 기록자인 천수산은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되었다.

  그때 박길창은 박장자의 제1대 박씨는 이름이 박세걸(朴世杰)이며 박장자의 박씨는 정황기(正黃旗)라고 분명하게 전하고 있었다. 박가원의 박씨가 양황기(攘黃旗)이고 또 당산(唐山) 야리(冶里)의 박씨가 정백기(正白旗)인 것과는 달랐다. 양황기와 정황기, 정백기는 8기(八旗)의 상3기(上三旗)로 모두 황제가 직접 통솔하는 친병이지만, 8기가 배열하는 엄격한 순서에 따르면 첫 자리는 양황기이고 두 번 째 자리는 정황기이며 세 번 째 자리는 정백기이다.

  기실 박가원과 박가장에 전하는 항렬 돌림자도 20자 전부가 똑 같은 게 아니다. 첫 번 째 돌림자인 인간 세(世)는 선비 사(士), 다섯 번째 돌림자인 길 영(永)은 날랠 용(勇), 열한 번째 돌림자인 나무 수(樹)는 말할 술(述) 등 일부 돌림자는 각기 다른 글자를 쓰고 있다. 박씨들에게 돌림자가 문자 아닌 구두로 유전하면서 일부는 동음이의어의 다른 글자로 전한 것 같다.

  족보가 있었다면 생길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박수붕은 연신 한탄을 했다. “우리 박씨의 옛 족보는 원래 우리 박가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요…”

  족보는 박씨의 계통과 혈통관계를 밝힌 책으로, 여타의 족보처럼 장자 계승이 원칙으로 되고 있었다. 족보는 가문을 계승하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족장 격인 맏아들이 보존하며 그가 족보를 잇는다. 박가원의 족보는 창성 창(昌)의 돌림자 즉 제10대의 박씨에 전승될 때 족장의 가문은 무남독녀가 잇고 있었다. 그런데 데릴사위 장씨(張氏)는 박씨의 족보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박씨의 족보는 20세기 6,70년대 유실되었고 이에 따라 나무처럼 얽힌 박씨의 뿌리는 일부 혼선을 빚고 있었다.

  그때 족보와 함께 보관하고 있던 청나라 때의 옛 패쪽도 소실되었다고 한다. 기실 예전에 이런 유물은 마을에 한두 개만 있은 게 아니었다. 건륭(乾隆, 1736~1796) 연간의 어용 필통 그리고 연대 미상의 황궁의 먼지떨이 꽂개 등이 있었다. 어용 필통에는 인감까지 찍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물건들은 1990년대 초반에 시골 마을을 찾은 약삭빠른 고물상들에게 다 팔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박씨의 선조가 옛날의 흔적을 하나도 남기지 못한 게 아니었다. 박수붕은 만주 8기에 있던 선조의 옛 기억이 아직도 그들의 낱말에 남아있다고 했다.

  “우린 늘 ‘아마(阿媽)’라는 말을 써요. 물론 아래 세대는 더는 이렇게 부르지 않지요.”

  ‘아마’는 만족어로 부친을 이르는 말이다. 오히려 박씨는 우리말 이름인 ‘아빠’를 아직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박가원의 박씨는 박장자의 박씨와 마찬가지로 만족 족명(族名)을 호적에 올리고 있다.

  사실상 만주 8기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그때 벌써 만족으로 동화되고 있었다. 그래서 반수 이상은 성과 이름을 합치하는 원유의 작법을 포기하고 있었다. 《만주씨족통보(滿洲氏族通報)》에 따르면 만주 8기에 조선인 성씨는 박씨를 비롯하여 김씨, 한씨, 이씨, 최씨 등 40여개나 된다. 그러나 반도 고유의 성씨인 박씨와는 달리 기타 조선인 성씨는 여러 민족 성씨에서 그들의 진실한 족명을 더는 분간하기 어렵다.

  인터뷰를 했던 박수붕의 이야기 역시 다른 이야기와 뒤섞이고 있었다. 분명히 박가원의 박씨 노인들에 의한 구전 이야기뿐만 아니었다. 귀동냥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박가원의 일부 구전에 물처럼 흘러들고 있었다. 박수붕은 예전에 박가원을 방문한 민속학자 천수산에게 박씨들의 옛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고 한다. 박수봉은 마침 천수산 일행을 동구의 강가에서 만나 마을을 직접 안내했던 것이다. 그 무렵 천수산 일행은 하북성의 유수의 옛 박씨 마을을 답사했다.

  그러나 박씨들에게는 물론 학자들에게도 그냥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었다. 박장자와 박가원 두 박씨 마을이 언제부터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분명한건 박가원와 박장자의 박씨 선인들이 옛날에는 한곳에서 함께 만나 나란히 이웃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박씨의 조종의 묘소는 다 노장자 마을에 있습니다. 노장자에는 선조의 묘소를 지키던 박씨의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지요.”

  노장자는 30여 가구의 작은 동네인데, 박씨가 아직도 10가구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박수원이 일행에게 소개한 박씨는 그와 같은 항렬인데, 박수발(朴樹發, 76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노장자는 박가원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산골 마을이었다. 고분 자리는 마을 뒤쪽 소북구(小北溝) 기슭의 평평한 둔덕에 있었다. 앞쪽으로는 작은 강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큰 산에 기대인 그런 곳이었다. 산이 호응하듯 구렁이처럼 멀리서 기어오고 있었다. 둔덕의 땅은 솜처럼 푹신푹신하여 발이 푹푹 빠지고 있었다.

  옛날 풍수장이가 장백산의 산맥을 따라 이 고분 자리를 찾았다고 박수발은 박씨들에게 구전하는 옛 이야기를 알려준다.

  “우리 선조님들은 유명한 풍수장이를 청해서 여기에 묘혈(墓穴)을 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행이 둔덕 위에서 만난 무덤은 고분이 아니라 새로 생긴 봉분이었다. 고분은 지난 세기 중반의 동란 때 마을의 전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박수발은 고분 자리를 가리키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지금은 평토가 되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옛 무덤이 여러 줄 배열되어 떼를 짓고 있었지요.”

  그때 묘소 좌우에는 또 무인(武人)과 문인(文人) 석상을 각기 하나씩 옹립했다고 한다. 와중에 석상 하나는 땅에 매몰되었고 그나마 하나는 두상(頭像)이 어디론가 떨어져있었다. 머리가 없는 옛 석상은 정오의 둔덕에 더구나 기괴한 정적을 연출하고 있었다.

[간주]

네,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 옛 마을의 옛에 조선인의 옛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의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헤무기’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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