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10-29 11:10:54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벗 ] 2021년 10월 28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네번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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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5일은 양력 해의 298번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를 마칠 때까지 두달 남짓한 67일이 남았습니다.

10 25일은 역사상 아주 특수한 날입니다.

1971 10 25 유엔총회 26 회의는 2758 결의를 통과하고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 의석을 회복했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출국한 후 제1차 전역의 첫 총성을 울리고 항미원조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51년, 중국공산당 당중앙은 10월 25일을 항미원조 기념일로 정했습니다.

2021년은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출국 작전 71주년 기념일입니다.

1981년 10월 25일, 스페인 화가 피카소가 탄생했습니다.

1979년 10월 25일, 인류의 천연두가 멸종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유엔 세계보건기구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세계적으로 천연두 병을 소멸했다고 선포하고 이를 위해 경축식을 가졌습니다.

2001년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개발한 컴퓨터 운영체제인 윈도우 XP가 뉴욕에서 세계에 정식 발표되었습니다.

[간주]

10월 25일의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 참전 기념일을 맞이해서 영화 ‘장진호’를 단체 관람했다고 중국 연길의 박철원 청취자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장진호’는 함경남도 중부의 장진군에 있는 인공호입니다. 이 호수는 압록강의 지류인 장진강을 댐으로 막아서 조성했습니다.

영화 ‘장진호’는 얼마 전 중국에서 개봉된 후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선전쟁 기간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에서 중국인민지원군과 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영화 ‘장진호’는 이 전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신 간주】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 참전 기념일을  맞아  24일  연길로인뢰봉반에서는  애국주의  영화  <장진호>를  단체관람하였다.

가렬처절한  장진호전역의  비장한  장면들은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을  폭넓게  펼쳐주었다.

로인들마다  영화의  주제,  스토리,  해설사와  드높은  과학기술내용에  감동을  금 치 못했다. 영화 관람석에서는  감격의  흐느낌도  들렸다.

모두  전쟁 없는  새 시대를  만들려고  피를 흘리며  싸우며  목숨까지  바친  선열들에게  숭경의  경의를  올렸다.

[간주]

2.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이 시간에는 ‘박씨 마을과 중국 대륙’, 대륙의 옛 마을 조선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런 제목으로 중국 대륙의 옛 마을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자희태후의 마수를 벗어난 박씨와 그의 후손들

이 이야기는 베이징의 ‘궁정정변’에 첫 꼭지를 떼고 있다. 기실 박씨의 선인(先人)은 천리 너머의 장성 밖에 벌써 이야기의 복선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들은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 일대에서 만주 8기에 편입되었으며 청군(淸軍)을 따라 장성을 넘어 베이징에 진출했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갑자기 ‘궁정정변’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때 세조님이 가족을 이끌고 외지에 피난을 했다고 합니다.”

박자유(朴自有)가 잠시 피신했던 곳은 당산(唐山) 부근의 난현(灤縣) 봉자진(棒子鎭)이였다. 박자유의 고손자 박만은(朴萬銀, 이미 사망)이 1980년대 말 방문자에게 이렇게 구술하고 있었다.

실제로 청나라 함풍(咸豊) 황제가 병사한 후 ‘궁정정변’이 일어났다. ‘궁정정변’은 자희(慈禧) 태후 등과 함풍 황제의 유언을 받은 숙순(肅順) 등 8대 고명대신(顧命大臣) 사이에서 인기된 것이다. 고명대신의 우두머리인 숙순의 목이 잘리는 등 8대 대신 계열의 관리는 전부 삭탈되었다. 이때부터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며 자희태후가 청나라 정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때가 1861년이었다. 통상 한 세대가 25년이라고 하니, 조대를 따져보아도 5대손 박자유가 살던 그 시기와 엇비슷하게 맞먹는다.

“‘궁정정변’은 말처럼 궁중에서 일어난 정변이죠, 그런데 일개 서민이라면 굳이 도읍을 떠나 도망을 했을까요?”

누군가의 어림짐작이다. 하긴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진출한 박씨 가문에는 황제를 보필하거나 8기병의 장령으로 있은 인물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박자유가 ‘궁정정변’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는 아직 일말의 문헌자료도 발견되지 못했다. 사실상 박자유와 그의 선인의 행적 자체가 ‘궁정정변’ 직전까지 거의 공백으로 되어있다.

‘궁정정변’의 그림자는 마치 악귀처럼 박씨의 뒤를 밟고 있는 것 같았다. 박자유가 봉자진에 이른 후 뒤미처 보기 드문 흉년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엎친데 덮인 격이었다. 박자유는 부득불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방랑하면서 걸식을 했다. 미상불 베이징을 급급히 떠날 때 행낭마저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그들은 장성을 넘어 북쪽 수백리 밖 진황도(秦皇島) 청룡현(靑龍縣)의 경내에 들어섰다.

다른 설이 있다. 베이징에 정착한 박씨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한 갈래는 난현의 봉자진에 이주했다고 《하북성지(河北省志)》가 기술하고 있다. 그 후 강희(康熙) 8,9년(1669~1670) 땅이 가물어 흉년이 들었으며 이때 박씨 부부 한 쌍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장성 밖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맙소사, 박자유는 두 조대의 장장 2백년을 장수한 하늘의 선인(仙人)이었을까…

사실상 옛날 봉자진에 살고 있었던 박씨는 박자유의 부부만 아니었다. 승덕현(承德縣) 양장자(良杖子)의 박씨들도 그들의 선조가 한때 봉자진에 살았다고 전한다. 그 무슨 사건 때문에 베이징을 떠난 박씨는 여럿이나 된다. 당산(唐山) 야리촌(冶里村)에 군집(群集)한 박씨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가문에 전하고 있다. 야리촌 박씨의 시조 박충문(朴忠文) 형제는 만주 8기에 편입되어 산해관(山海關)을 넘었는데, 그들도 원수를 피하기 위해 부득불 베이징을 떠났다고 박충문의 8대손 박동성(朴東成, 89세)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충문 형제가 베이징을 떠난 것은 1730년의 무렵이다. 참고로 승덕시(承德市) 평천현(平泉縣) 박가원(朴家院) 박씨의 선조는 강희 8년(1669), 칙지를 받들어 장성 부근에 정착했던 황제의 수하로 알려지고 있다.

문헌자료와 박씨 가문의 기술을 정리하면 하나의 결론을 짓게 된다. “베이징을 떠난 박씨는 서로 시기가 다르고 또 인물도 다르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동일한 성씨 때문에 서로 다른 인물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하나의 시기와 하나의 인물로 합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기와 서로 다른 박씨의 이야기는 종국적으로 완정한 줄거리를 갖추고 시작과 결말을 잇는 한편의 소설처럼 읽히고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가족의 궁중 비사(秘事)를 회억할 때 박만은은 청룡현 팔도하향(八道河鄕) 탑구촌(塔溝村)의 박씨 가족에서 항렬이 제일 높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름자에 넣은 일만 ‘만(萬)’의 돌림자의 의미와는 달리 그가 기억에 담고 있는 가족사는 많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현재로서는 박만은은 물론이요, 방문자인 연변의 민속학자 천수산(千壽山)도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으로 되고 있다. 그때 박만은의 구술 내용이 박씨 가족의 조사실록에 문자로 일일이 기록된 게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일행이 탑구에서 만났던 박만령(朴萬伶, 77세) 등의 구술은 박만은의 전부가 아닌 일부를 중복하는데 그치고 있었다. 박만령은 탑구 박씨 가족의 일만 ‘만(萬)’ 돌림자 항렬에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이다.

박만령은 선조가 후손에게 남긴 것은 단지 박씨 성씨뿐이 아니라고 했다. 선조가 옛날 갖고 있던 실물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때 고조부님은 아내랑 함께 멜대를 메고 왔는데요, 멜대의 한쪽에는 아들을 싣고 다른 한쪽에는 돌태를 실었다고 하지요.”

돌태는 흙덩이를 고르거나 씨앗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연장이다. 길을 떠난 후 짐이라곤 멜대에 실은 어린 아들밖에 없는 박자유가 하필이면 무거운 농기구의 돌태를 소지한 이유가 있었다. 저울 천평(天平)처럼 양쪽에 서로 평평하게 만든 중량의 보정(補正)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박자유의 후손에게는 농기구의 의미를 떠나 가족의 이주사를 사진처럼 보고 책처럼 읽을 수 있는 유물로 된 것이다.

박자유의 직계 후손인 박만은에게 이 돌태가 전승되었고, 현재로선 박만은의 다섯째 아들 박재(朴財, 62세)가 집 뒤뜰에 돌태를 보관하고 있었다.

돌태는 청룡현 중서부의 박장자(朴杖子)에 이른 후 비로소 농기구의 원래의 기능을 회복했다. 박장자는 박씨가 지경 말뚝을 박은 곳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렇다고 박자유로 인해 생긴 마을은 아니었다. 일찍 강희(康熙) 9년(1670), 웬 박씨가 또 부근의 창려현(昌黎縣)에서 천입하여 정착했으며 그의 성씨를 따라 마을을 박장자로 작명했다고 청룡현의 《지명자료회편(滙編)》이 기재하고 있다.

박자유가 그의 말뚝을 땅에 박을 때 최초로 정착한 박씨는 벌써 이곳에 살고 있지 않은 듯하다. 훗날 이 박씨는 그 흔적을 박장자의 옛 이름에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박자유도 얼마 후 박장자를 떠나면서 또 멜대를 어깨에 올려놓았다. 박자유의 집안에 일대 ‘정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박만령이 그 내력을 전하고 있었다.

“고조부님은 박장자에서 관씨(關氏) 성의 만족 고아를 입양했는데요, 그런데 이 입양아가 장가를 간 후에는 박씨 가족과 몹시 불목했다고 합니다.”

박자유의 가족은 북쪽 20리 밖의 마을 탑구에 행장을 풀어놓았다. 그때까지 탑구는 만족과 한족이 어울려 살고 있는 1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었다. 약 150년 동안 마을은 계속 탑처럼 마을을 크게 쌓아올렸다. 박씨 가족도 계속 번식하면서 종국적으로는 백명 단위로 헤아리는 큰 가족으로 되었다. 박자유의 후손도 어느덧 제7대, 제8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박재는 가족에 족보가 없는 게 큰 유감이라고 했다.

항렬 돌림자는 가족 사람들의 서열을 알려주는 표지이다. 돌림자의 소실은 탑구를 양쪽으로 뭉텅 갈라놓은 도랑처럼 3백년의 박씨 가계를 홀연히 끊어버리고 있었다. 실제로 탑구의 이 도랑이 바로 박씨 가족을 갈라 지파(支派)를 만들었다고 한다. 탑구 박씨의 사상 최대의 ‘정변’은 정말로 이 도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광서(光緖) 13년(1887), 선조 박자유처럼 ‘멜대’를 메고 고향을 등진 후손이 나타났다.

“그때 탑구에 심한 수재가 일어났다고 해요. 그래서 조부의 한 형제가 위당구(葦塘溝)로 이사했지요.”

잠깐, 박만은의 이 구술은 뭔가 이치에 어긋나고 있는 듯하다. ‘궁정정변’이 일어난 1861년경 박자유가 어린 아들을 멜대에 실을 정도라면 그로부터 25년 후 탑구에 수재가 일어날 때 아들은 기껏해야 30대 정도이다. 이에 따르면 제3대의 손자가 있었더라도 이때는 아직 독립한 성인으로 장성하지 못한 어린 나이라는 것이다. 한편 관변측 문헌인 《하북성지》는 탑구에서 인구가 번성하면서 땅이 부족했으며 이 때문에 박씨 가족이 이주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대영자향(大營子鄕) 위당구촌과 근처 맹가와포촌(孟家窩鋪村)의 박씨는 분명히 박자유의 3대손인 박태(朴太와 박복(朴福) 두 형제의 후손이라고 현지의 박씨에게 전한다. 대영자향은 탑구에서 북쪽으로 약 20리 상거하는데, 박만은이 구술하던 그때 박씨는 거의 100명 단위의 인구로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멜대’를 메고 타지로 떠난 박씨는 박태와 박복 형제만 아니었다. 일부는 마을 뒤쪽의 도산(都山)을 넘어 승덕시 관성현(關城縣)에 이사했고 또 대륙 북단의 흑룡강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산은 청룡현과 관성현의 접경지역에 있는 큰 산이다.

와중에 관성현 양갑대(亮甲臺)에서 살던 박경재(朴慶財, 77세)는 조상이 살았던 탑구를 30여 년 전에 처음 찾았다. 이때 박경재는 세조 박자유의 5대손인 박만령을 만나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한다.

탑구 밖의 일부 박씨는 청명이 되면 종종 이곳을 찾아오고 있었다. 탑구 서쪽의 도산 기슭에는 박자유와 그의 3대 이내의 일부 자손의 묘소 12기가 있었다. 묘소는 뒤에 산을 뒤에 기대이고 있었으며 앞으로 먼 산이 보이는 평지에 있었다. 묘소 양쪽에는 또 각기 나지막한 산이 서있었다. 도산 건너 저쪽 박가원의 박씨가 조상을 모신 옛 묘소 자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박재 역시 박가원의 박씨처럼 가문의 어르신이 미리 풍수를 보고 조상의 묘혈을 잡았다고 말한다.

미구에 박씨 가족에 재화가 미친 것은 수재가 나면서 조상 묘소의 풍수를 해쳤다는 것이다. 실제 광서 연간에 탑구를 들이닥친 골물은 도랑 곬을 박자유와 그 후손 묘소의 근처까지 파헤쳤다. 박자유의 후손들이 미구에 그들의 선조가 살던 곳을 떠나게 된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것.

청룡현 박씨의 진실한 족명(族名)은 1964년에 밝혀졌다. 이때 정부가 민족 성분을 식별, 확인하면서 만족이 아닌 조선족으로 주민등록증에 족명을 올렸다. 청룡현의 박씨는 이로써 제일 오랜 이주사를 공식 보유한 조선족으로 되었다.

기실 박재와 그의 윗세대인 박만령은 모두 조선족의 풍속이나 언어 등을 옛 세대부터 말끔히 잊고 있었다. 그럴지라도 박재는 계속 가족의 뿌리를 찾고 싶다고 말한다. 한때 그는 ‘고려인’이 살고 있었다는 옛 마을 ‘고려포(高麗鋪)’를 찾아갔다고 한다. 고려포는 선조 박자유가 살던 박장자와 20리 떨어진 곳이다. 나중에 박재는 실망과 함께 더구나 큰 의문을 안고 돌아왔다. 고려포의 옛 주인은 명(明)나라 말, 청나라 초 대륙에 살던 그의 박씨 선조와 같은 ‘고려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대의 고려인(고구려인)들이라고 하는데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 마을에 점포를 세웠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해요.”

사실상 하북성의 일부 박씨는 그들의 대륙의 연원을 명나라를 지나 원(元)나라 심지어 그 앞의 당(唐)나라 시대에서 찾고 있었다. 선인의 옛 기억은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산 저쪽 승덕의 박씨 후손에게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었다.

멜대를 메고 장성을 넘은 박씨의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고 있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의 버들방천에 있었던 그 부락은 ‘헤무기’라고 불렸다고 하는데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헤무기’는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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