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27 20:40:41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10월 27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10월의 네번 째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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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인 10월 27일은 양력 올 해의 30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올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두달 남짓한 65일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0월 27일은 세계작업치료의 날입니다. 작업 치료는 생활을 더욱 아름답게 합니다.

세계 작업치료의 날은 2010년 10월 27일, 작업치료 전문의 국제기구인 세계작업치료연맹이 발기했습니다. 연맹은 세계 101개 작업치료의 전문조직으로 구성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해마다 10월 27일이면 전 세계에서 모두 주제 형식으로 작업치료를 보급합니다. 작업치료사들은 이날이면 그들의 명절을 축하하며 함께 국제적으로 작업치료 영향력을 넓힙니다.

 작업치료는 일상생활의 활동들을 치료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손상이나 질병, 질환 등으로 인한 장애, 사회 활동의 제한, 사회 참여의 위축 때문에 일상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환자를 훈련합니다. 작업치료사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육체적, 인지적, 심리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가정과 학교, 직장, 지역 사회 등의 환경과 역할에 참여하도록 돕습니다.

 작업치료 전공은 20세기 초에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작업치료사라는 이 직업은 1917년 미국작업치료협회의 설립에 따라 정식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초기의 작업치료 환자는 제1차 세계대전 전투에서 돌아온 병사들이었습니다.

 10월 27일은 또 세계 연애의 날입니다.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명절이 있는데요, 해마다 10월 27일은 세계 연애의 날이라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날 청혼을 하면 거부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감미로운 사랑이 있길 바랍니다.

 10월 27일 이날 보내는 선물은 거개 ‘정신적인 것’입니다. 온라인이거나 핸드폰을 통해 사랑의 암시를 보내거나 “너는 나의 제일의 사랑”이라는 중국말 의미의 숫자 04592를 보내는 등입니다. 이런 코드를 올바르게 해독할 때 자연히 상대방이 전달한 사랑의 의미를 읽게 됩니다.

 세계 연애의 날을 열광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생 사물을 쉽게 받아들이는 30살 이하의 젊은이들입니다. 전통적인 영향을 많이 받은 30살 이상의 사람들은 이보다 서양 분위기가 짙은 발렌타인데이를 즐깁니다. 

[간 주]

 이 시간에는 “정강산의 홍군에 있었던 조선인 대대장 진용학”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강산의 홍군에 있었던 조선인 대대장 진용학

 정강산(井岡山)의 이름은 강서성(江西省) 서남부의 산골마을에서 시작된다. 시초에는 마을 주변에 산이 둘린 지세가 우물을 방불케 하고 또 마을에 강이 흐른다고 해서 우물과 강, 산을 합쳐 ‘정강산촌(井江山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현지인들의 발음에서 물 이름 ‘강(江)’이 언덕 ‘강(岡)’과 비슷하다고 해서 나중에 이처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작 중국 첫 농촌혁명근거지의 대명사로 된 것은 고 국가주석 모택동(毛澤東)이 작성한 보고서에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1928년 11월,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서 《정강산의 투쟁》을 회부하면서 처음으로 ‘정강산’이라는 이 명칭을 사용했다.

이 무렵 당 대표 모택동은 군단장 주덕(朱德)과 더불어 홍군(紅軍) 제4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다.

약칭 홍4군(紅四軍) 즉 중국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은 1928년 4월 모택동이 인솔한 추수(秋收)기의의 부대와 주덕(朱德)이 영도한 남창(南昌)기의의 부대가 정강산에서 합류한 후 통합, 편성된 군부대의 번호(番號)이다. 정강산의 이 합류는 중국 혁명의 불씨를 확보했으며 미구에 들판의 큰 불길을 만들었다. 홍군은 항일전쟁시기 신사군, 팔로군, 동북민주연군 등 이름으로 불리다가 종국적으로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다.

훗날 홍4군의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사단과 군단급 간부로 성장한 경우가 적지 않다. 홍4군 초기에 대대장으로 있던 임표(林彪)는 나중에 공화국의 원수로 등극했다.

정강산 시기의 이 홍군 대오에는 진용학(陳龍鶴)이라고 하는 조선인 대대장이 있었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학하였고 북벌(北伐)전쟁에 참가했으며 추수기의에 참가했다고 전하는 전기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진용학은 그때 그 시절의 난세에 혜성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진용학은 선배 학자들이 벌써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추적된 인물이라고 사학자 최봉춘이 말한다.

최봉춘은 진용학에 대한 사학계의 연구가 대부분은 부득불 제3자의 구술에 의거하고 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직도 기연미연(其然未然) 하고 있으며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중국 최대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百度)에 진용학에 대한 소개는 겨우 300여자에 불과했다. 실제로 진용학은 출생일이나 고향이 미지수로 있는 등 세간에 남긴 흔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그때부터 몇 년 후 남방의 어느 한 전투에서 희생하기까지의 짧은 경력이 그의 전부로 되고 있으니 말이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황포군관학교는 국민당의 창시자 손중산(孫中山)이 1924년 5월 광동성(廣東省) 광주시(廣州市) 황포구(黃浦區)의 장흥도(長興島)에 세운 정치군사학교이다.

이 무렵 조선인 무장독립단체 의열단(義烈團, 1919)은 중산대학(中山大學), 황포군관학교 등의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은 1924년 시작된 제3기부터 1949년 졸업한 제22기까지 황포군관학교에 나타난다. 바이두 백과는 진용학이 1926년 10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북벌에 투신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황포군관학교 동학록(同學彔)》의 제4기 졸업생 명부에는 진용학의 이름이 출현하지 않는다.

진용학이라는 인물은 애초부터 황포군관학교 4기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최봉춘이 말한다.

1926년, 국민정부가 진행한 통일전쟁인 북벌(北伐)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10월, 북벌군이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을 공략한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 즉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가 설립되었다. 진용학은 바로 이 무한분교 포병학과의 5기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최봉춘이 밝히고 있다. 이미 4기를 졸업했다고 하면 무한분교에 다시 재학할 수 없다는 것이다.

최봉춘에 따르면 유악(留鄂, 鄂은 호북성의 약칭)한국혁명청년회’의 장정(章程)에 회원 진용학은 포병과라고 똑똑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행물 《조선일보》의 1927년 3월 16일자 기사 내용에 밝힌 것이다. 유악한국혁명청년회는 1927년 초 호북성에서 결성된 조선인 진보단체로 황포군관학교 학생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무한분교는 이 청년회에 학생 모집을 위탁하고 그들이 모집한 조선인청년을 입교시키고 있었다.

무한분교에는 역사상 5기 포병과와 6기 정치과가 있었을 뿐이다. 포병과는 광주에서 전학해온 황포군관학교 본교 5기생들이 북벌전쟁에 투신하여 무한에 도착한 후 곧 무한분교에 재편성된 것이다.

1927년 무렵, 무한분교 포병과에는 조선인 2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국혁명청년회가 전한다. 그러나 나중에 검색되는 조선인 졸업생은 6명뿐이며 진용학은 여기에 망라되지 않는다. 진용학의 고향과 출신, 나이 등도 이에 따라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다.

솔직히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의 구체적인 신상은 물론 정확한 수효도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인들은 입교할 때 조선과 중국의 이중 국적을 소지했고 또 만주지역 등으로 출신지역을 위장했으며 가명을 사용했다. 일본 정보망의 포착과 이로 인한 국제적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27년 7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후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는 문을 닫게 된다. 이 무렵 또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무한 한국혁명청년회에 의해 제6기생으로 재학하고 있었다. 이들 무한분교의 일부 학생은 엽정(葉挺), 하룡(賀龍)의 부대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 학생은 장발규(張發奎)부대의 교도(敎導)연대에 편입되었다. 이에 앞서 6월, 중국공산당은 장발규부대를 협조하여 총 지휘부 경위연대를 편성하는데, 진용학이 당의 위임, 파견을 받아 이 연대의 일원으로 되었다.

훗날 엽정, 하룡의 부대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대개 남창기의에 참가하며 교도여단에 편입된 조선인들은 거개 광주기의에 참가, 진용학이 소속된 경위연대는 추수기의에 참가한다. 추수기의는 남창기의와 광주기의와 더불어 1927년 중국공산당이 국민당 우파에 반항하여 일으킨 3대 기의이다.

진용학은 1927년 9월 9일 추수기의에 참가하며 이어 기의부대와 함께 정강산에 오른다. 그는 선후로 정강산에서 벌어진 오두강(五斗江), 용원구(龍源口) 전투와 영신(永新)의 3차 공격 등 유명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8년 8월, 모택동은 제31연대 주력을 인솔하여 이웃한 호남(湖南)에 홍군 대오를 접응하러 갔다. 예하의 1대대는 정강산에 남아 수비를 담당했다. 이틈을 타서 국민당 군대 4개 연대의 병력이 정강산을 진공했다. 소대장 진용학은 다른 부대와 배합하여 국민당 군대의 여러 차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황양계(黃洋界) 보위전의 승리를 거뒀다. 황양계는 정강산의 북쪽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이 시기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제3자의 자세한 회억이나 증언, 기록이 없으며 따라서 영구한 미스터리로 되고 있다. 그러나 진용학이 1929년 제31사단 31연대 1대대 3중대 중대장으로 (진급되어) 있었다고 하는 짧은 기술에 따르더라도 진용학의 뛰어난 전투능력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을 법한다.

그러나 진용학의 전투경력은 아쉽게도 얼마 후 마침부호를 찍었다.

《정강산홍군인물지(人物志)》(2010, 강서인민출판사)는 정강산의 홍군열사를 소개한 권위적인 문헌이다. 이 책은 진용학이 희생된 경위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29년 1월 (진용학은) 홍4군 주력을 따라 정강산을 떠났으며 공남(贛南, 강서성 남부), 민서(闽西, 복건성 서부)로 갔다. 1932년 4월, 홍12군은 복건성(福建省) 남부의 중요한 도시 장주(漳州)를 공략하는 전역에 참가했다. 격전에서 진용학은 불행히 희생되었다.”

에피소드가 있다. 장주전역에서 홍군은 국민당 군대의 비행기 한 대를 노획하는 것. 이때 노획한 비행기를 홍군부대의 조선인이 수리, 조종했다고 공화국의 원수 섭영진(聶榮臻)이 그의 회억록에 기재하고 있다.

이 조선인은 서금 중앙혁명근거지 후근부문의 군사기계과 과장으로 있던 진덕근(陈德勤)라는 게 거의 통설로 되고 있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진덕근은 본명이 이한설(李漢卨)이며 함경북도 종성군 어랑면 출신이다. 진덕근은 1929년 서울 여의도에 설립되었던 조선비행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그 시절 비행술은 물론 비행기의 분해와 조립, 수리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최봉춘은 비행기 조종사가 운남(雲南)항공학교를 다녔던 의열단 단원 장지일(張志日)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시야비야를 떠나서 중앙혁명근거지에는 또 양림(楊林) 교관 등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복수의 조선인이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양림은 홍군 제1군단 참모장으로 있는 등 홍군의 중견 인물이었다. 홍군 부대의 조선인은 최소 10명 정도였으며 상기 진덕근을 비롯하여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공산당 상해 조선인지부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고 최봉춘이 밝힌다.

이 무렵 희생되었거나 실종된 조선인은 진용학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황포군관학교 학생이었다고 주장하는 최정무(崔鼎武)는 어느 한 전투에서 국민당 군대에 포로로 되면서 홍군 대오를 떠났던 것이다.

홍군 시절에 희생, 실종된 장병은 수만 명으로 헤아린다. 진용학은 황포군관 학생이고 북벌군이며 홍군 대대장이고 또 외국인이라는 이 특이한 다종 신분 때문에 기억의 편린이나마 만들 수 있지 않았을지 한다.

[간 주]

네, 많은 역사 사건의 중심에 서있었고 또 현대사의 많은 명인들이 대대장 진용학처럼 세월 속에서 더는 사진 한 장 찾기 어려운 미스터리의 인물로 되고 있습니다.

“정강산의 홍군에 있었던 조선인 대대장 진용학”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중국의 고전명작 《서유기》는 당승 현장(玄奘, 602~664)의 천축天竺 여행을 모티브로 삼아 명明나라 때 나온 신괴神怪 소설입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실제로 당승 현장의 제자로 있은 신라의 승려가 있었는데요, 이 신라 승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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