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진설명: 아름다운 임치의 일각)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다섯 번째는 제(齊) 나라의 도읍 임치(臨淄)이다. 800여년 동안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으뜸,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제 나라의 도읍이었던 임치, 풍부한 제 나라 문화재가 많이 남아 있고 많은 명인들의 무덤도 보존된 임치는 ‘지하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산동(山東)성 중부, 산지와 평원이 연결된 곳에 위치한 임치는 원래 영구(營口)라 불렀는데 동쪽으로 임치강이 흐른다고 해서 제헌공(齊獻公)에 의해 임치가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11세기 주무왕(周武王)이 상(商)을 멸하고 강태공(姜太公)에게 영구를 봉지로 하사했으며 강태공은 이곳에 제 나라를 세웠다. 그때부터 제환공(齊桓公)에 의해 춘추오패의 으뜸이 되고 제 나라 위선왕(威宣王) 때 전국칠웅이 되었다가 서진(西晉)에 의해 멸망하기 까지 임치는 도합 1300여 년 동안 제후국의 도읍이었다.
(사진설명: 임치에서 출토된 문화재)
삼대(三代) 때 제 나라의 도읍이고 한(漢) 나라 때 제 나라의 왕성(王城)이었던 임치는 제문화(齊文化)의 중요한 발상지이다. 제 나라 사람들은 경학을 좋아하고 공명을 자랑스러워하며 지혜로왔다.
전국시기 제환공과 위선왕 때 임치의 직문(稷門) 밖에 세운 직하학궁(稷下學宮)에는 여러 학파의 대표인물들이 집중되어 중국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를 열었으며 포용적이고 사상이 자유로운 학풍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강태공(姜太公)과 관중(管仲), 포숙아(鮑叔牙), 안앵(晏罌)을 비롯한 현명한 군주와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 곳에서 나타났고 또 사마양저(司馬穰苴)와 그의 저서 <사마법(司馬法)>, 손무(孫武)와 그가 펴낸 <손자병법(孫子兵法)>, 손빈(孫臏)과 그의 저서 <손빈병법> 등 군사가와 병서도 이 곳에서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사진설명: 관중 기념관의 일각)
그밖에 의약학자들인 편작(扁鵲)과 순어의(淳於意), 천문학자 감덕(甘德), 수학 학자 설봉조(薛鳳祚), 농학가 가사협(賈思勰)과 그의 농학저서 <제민요술(齊民要術)>, 시인과 문학자들인 좌사(左思), 좌분(左芬), 단성식(段成式) 도 모두 임치에서 났다.
오늘날까지 환공대(桓公臺)와 안앵의 무덤, 동주(東周) 때 무덤의 순마갱(殉馬坑), 임치 고대 무덤의 군락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된 임치는 ‘지하 박물관’이라 불린다.
제국고성(齊國故城) 유적은 기원전 9세기 중반, 제 나라의 일곱 번째 군주인 제헌공이 박고(薄姑), 오늘날의 산동 박흥(博興)으로부터 이 곳에 천도해서부터 기원전 221년 진(秦) 나라가 제 나라를 멸할 때까지 638년 동안 제 나라의 국도가 되어 임치는 당시 중국 동방의 중요한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제후국들 중 가장 번화한 도성(都城) 중 하나였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제국고성 유적)
현재까지 보존된 제국고성 유적은 대성(大城)과 소성(小城)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소성은 대성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대소 두 성은 교묘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성, 즉 외성(外城)은 관리와 서민, 상인들이 살던 곳이고 소성, 즉 왕성(王城)은 제 나라 군주가 생활하던 곳이다. 두 성의 총 면적은 15.75㎢에 달하고 13개의 성문을 두었다.
현재 고성의 성은 다수가 지하에 매몰되고 일부 옛 성터만 남아 있다. 성안에는 도로가 얼기설기한데 지금까지 성문과 연결된 10갈래의 도로를 발굴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제국역사박물관)
고성의 배수시스템은 아주 합리적이고 엄밀하게 조성되어 2천 년 전에 벌써 이런 성곽공사를 했다는 것에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당시 사람들은 고성에 배수구와 해자를 파면서 자연의 물길과 하나로 융합시켜 완전한 배수 및 방어 시스템을 형성했다.
고성에 보존된 문화유적은 아주 풍부하다. 현재까지 구리주조와 동전제조, 제철, 골(骨) 작업실을 망라해 많은 유적지를 발굴했다. 소성의 서북쪽에 있는 ‘환공대’라 불리는 높은 단은 제환공이 제후들을 만나고 군사를 열병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제국고성 유적지에 세워진 제국(齊國) 역사박물관은 외관이 보루 식으로 되어 있다. 15개 전시홀로 구성된 이 박물관에는 300여 점의 문화재가 전시되어 제 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눈부신 문화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중국 고차 박물관의 일각)
후리(後李) 문화 유적지에 신축한 중국 고차(古車) 박물관은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전한, 중국 최초로 병거와 말 유적지에 문화재 전시를 융합시킨 이색 박물관이다.
춘추(春秋) 순장마차(殉馬車) 전시홀과 중국 고차 전시홀 두 부분으로 된 이 박물관의 으뜸은 규모가 크고 시설이 구전하며 장식이 정교한, 중국의 제일을 자랑하는 후리(後李) 춘추(春秋) 순장마차(殉馬車)이다.
그 밖에 제국고성 안팎에는 제 나라 왕들과 명사들의 무덤 150여기가 남아 있다. 그 중 강태공 의관총(衣冠冢)과 이왕총(二王冢), 사왕총(四王冢), 관중묘(管仲墓), 삼사총(三士冢), 안앵묘(晏罌墓), 대형 순마갱이 가장 대표적이다.
(사진설명: 강태공 사당의 일각)
임치의 동쪽 교외에 위치한 강태공 의관총은 봉분의 높이가 18m, 남북너비 50m, 동서길이 55m에 달한다. 사서에는 “태공이 주(周)에 묻혔는데 제 나라 사람들이 그의 덕행을 기리어 의관총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태공은 중국의 위대한 군사가이자 정치가이다. 중국 최초의 병서인 <육도(六韬)>가 강태공의 저서라고 전해지며 강태공은 역사적으로 손자(孫子)와 함께 ‘무성(武聖)’이라 불린다.
1992년에 강태공 의관총을 기반으로 강태공사당(姜太公祠)을 신축했다. 강태공사당은 삼군전(三君殿)과 오조전(五祖殿), 오현전(五賢殿), 도사원(道士院) 등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녹음 속에 비석이 즐비하고 향불연기가 자욱해 아늑하다.
(사진설명: 태공호 공원의 일각)
제국고성 유적지의 동북쪽에 위치한 ‘갑(甲)’자 모양의 무덤이 바로 제 나라 제25대 군주 제경공(齊景公)의 무덤이며 무덤 주변에 대 규모 순마갱이 펼쳐져 있다.
순마갱은 길이 215m, 너비 5m, 깊이 2m에 달한다. 순마갱에는 도합 600여 필의 말이 묻혀있는데 말은 모두 군마이다. 갱에 묻힌 이런 군마들은 혹은 옆으로 누워 있고 혹은 달리는 자세를 취하는데 제일 앞쪽에 있는 다섯 필의 말에는 방울도 달려 있다.
풍부한 문화 유산을 보유한 임치는 또 중국의 5대 도자기 생산기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임치에서 나는 일용 도자기와 도자기 조각, 유리 조각, 먹 등은 중국시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함은 물론이고 멀리 해외에까지 수출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