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3 09:20:47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6] 한단: 趙 나라의 도읍

(사진설명: 아름다운 한단)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여섯 번째는 옛 조(趙) 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이다. 3천여 년의 세월은 한단에 아주 많은 것을 남겨 한단은 하북(河北)성에서 가장 유구한 도시이자 유명한 ‘사자성어와 고전의 고장’으로 불린다.

한단에는 1500여 곳의 문화재와 유적이 남아 있다. 그 중 자아를 잃고 남의 흉내만 냄을 말하는 한단학보(邯鄲學步)와 덧없는 삶을 말하는 황량일몽(黃粱一夢) 등 한단에서 기원한 많은 사자성어는 중화민족의 지혜와 진리를 내포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한단은 광활한 역사의 무대로 타인의 장점을 잘 따라 배움을 보여주는 호복기사(胡服騎射)의 이야기와 사구(沙丘)의 난, 한단의 전투 등 역사사실들은 모두 웅장하면서도 비장한 한단의 서사시를 엮는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한단)

하북성의 남쪽, 태항산(太行山)의 동쪽 기슭, 하북과 산서(山西), 산동(山東), 하남(河南) 네 개 성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한단은 3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의 옛 도시이다. ‘한단’이라는 지명을 한 번도 고치지 않고 3천년 동안 계속 사용하는 것은 중국의 도시들에서 아주 보기 드물다.

상(商) 나라 후반에 한단성 조성을 시작하고 주왕(紂王)이 한단에 이궁별관(離宮別館)을 지으면서 한단은 상 왕조의 정치활동 장소로 부상했다. 춘추(春秋) 시기에 한단은 또 위(衛) 나라와 진(晉) 나라의 중요한 성읍이었다.

기원전 386년 조 나라 군주 조경후(趙敬侯)가 한단으로 천도하고 당시의 한단성 서쪽에 왕성(王城)을 축조하면서 한단은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하나인 조 나라의 국도가 되었다. 그때로부터 한단은 8명의 군주를 거치며 158년 동안 당시 황하(黃河) 강 북쪽 기슭 최대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한단성문)

조 나라의 도읍으로써 한단은 조 나라의 정치와 경제, 군사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중원(中原) 지역의 제철과 상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당시 제철업에 종사하는 한 수공업자의 자산이 나라의 군주와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로부터 한단 제철업의 규모와 그 발전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제철업의 발전은 수공업과 농업, 상업의 발달도 추진해 당시 사면팔방에서 부자들이 한단에 모여 들어 보석장사를 생업으로 하기도 했는데 돈을 물 쓰듯 한 여불위(呂不韋)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한(漢) 나라 후반, 조조(曹操)가 업성(鄴城)을 점령한 후 한단성을 증축해 북방 군사와 정치 중심지로서 한단의 입지를 더욱 다졌다. 그 후 후조(後趙)와 남위(冉魏),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齊) 등 여섯 왕조도 계속해서 한단에 도읍을 두었다.

(사진설명: 한단성의 일각)

그 뒤의 당(唐) 나라 때에 한단의 대명부(大名府)가 점차 궐기해 ‘기보팔부(畿輔八府)의 으뜸’이 되었으며 송(宋) 나라 때 한단은 국도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배도(陪都)가 되었다.

유구한 역사는 한단에 눈부시면서도 풍부한 문화자원을 많이 남겼다. 조 나라 및 한단의 역사와 연관되는 사자성어와 고전은 천 여 가지에 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단의 고전이 없으면 이 세상의 문장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손빈(孫臏)이 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위(魏) 나라를 포위한 ‘위위구조(衛魏救趙)’의 이야기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혜로 조 나라의 옥을 그대로 돌려 받은 ‘완벽귀조(完璧歸趙)’, 염파(簾波)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인상여(藺相如)에 처분을 구한 ‘부형청죄(負荊請罪)’, 스스로 자진해 나서는 ‘모수자천(毛遂自薦)’, 탁상공론에만 능한 조괄의 ‘지상담병(紙上談兵)’, 일언 중천금의 ‘일언구정(一言九鼎)’, 한신(韓信)이 배수진을 친 ‘배수일전(背水一戰)’ 등 이야기의 사자성어들이 모두 한단에서 발생했고 그로 인해 한단은 ‘성어의 고향’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진설명: 한단성어고전원의 일각)

이런 사자성어와 고전들은 지금까지 널리 전해지고 사용되면서 사람들에게 시사점을 안겨 준다. 그 중 남가일몽을 말하는 황량일몽(黃粱一夢)은 영화와 부귀는 남가일몽처럼 짧고 허황함을 뜻하거나 꿈속에서도 그리던 욕망이 헛되이 됨을 의미한다.

전한데 의하면 당(唐) 나라 때인 719년, 노생(盧生)이라는 선비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입경하다가 한단의 한 여관에 머물렀다. 여관 주인이 노란 메조 쌀, 황량미(黃粱米)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노생은 잠이 들었다. 노생은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누리다가 80세가 되어 큰 병에 걸려 곧 죽게 되었을 때 잠에서 깼다.

노생이 눈을 떠보니 자신은 여전히 잠들기 전 그 여관방에 있었고 주인은 아직도 밥을 채 짓지 못했다. 자신이 잠깐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임을 안 노생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과거시험을 보러 가지 않고 심산에 들어가 수련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황량일몽의 유래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조왕성 유적)

‘사자성어와 고전의 고향’이라는 미명을 더욱 잘 이어 나가기 위해 한단은 1997년 성어전고원(成語典故苑)을 건설했다. 이 단지는 조 나라 문화에 기반해 비석과 조각, 도자기 벽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한단에서 기원한 58개 사자성어와 고전을 선택해 그 스토리를 생동하게 재현했다.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자원은 한단성에 풍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한단성의 서남쪽에 위치한 조왕성(趙王城)은 전국(戰國) 시기 조왕의 궁성이 위치한 곳이다.

동쪽과 서쪽, 북쪽에 각각 위치한 세 개의 작은 성으로 구성된 조왕성은 단면이 한자로 ‘품(品)’자 형을 나타낸다. 그 중 조왕성의 주요 성이었던 서성에 용대(龍臺)와 남장대(南將臺), 북장대(北將臺) 등 축조물이 남아 있다. 부지 500여만 ㎡에 달하는 조왕성은 현재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전국시기 고성의 옛터이다.

(사진설명: 웅장한 무령총대)

고성 한단의 심벌인 무령총대(武靈丛臺)는 한단 도심의 총대공원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조무령왕(趙武靈王)이 군대를 검열하고 가무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공중다리와 동굴, 가든을 망라해 다양한 경관이 조성되었던 기존의 총대는 세월 속에 점점 사라지고 현재 건물은 청(淸) 나라 때에 개축했다. 무령총대는 청색의 벽돌로 둘레 1,100m, 높이 28m에 달하는 3층의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무령관(武靈館)과 회란정(回瀾亭), 거승정(據勝亭) 등 건물을 축조했다.

무령총대에는 또 명(明) 나라 때의 회화나무도 남아 있어 고건물에 예스러움을 가미한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무령총대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오늘날의 한단이 한 눈에 안겨 온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학보교)

한단시 북관가(北關街)에 위치한 학보교(學步橋)는 원래 목조였으나 명 나라 때 석교로 다시 축조했다. 32m 길이에 9m너비, 8m 높이의 학보교는 난간과 기둥에 모두 역사 스토리와 사자, 원숭이 등 동물의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힌다.

학보교의 옆에는 또 남의 흉내만 내다가 자아를 잃음을 말하는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조각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교훈적인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밖에 한단에는 조 나라 상경(上卿) 인상여가 나라를 위해 대장군 염파에게 길을 양보했다는 회거항(回車巷)이 남아 있어 사람들에게 인상여의 넓은 흉금을 상기시킨다.

(사진설명: 향당산 석굴의 일각)

또 조무령왕이 말을 타고 사격을 하며 기마병을 훈련시키던 삽전령(揷箭嶺) 유적과 전국(戰國) 시기의 조왕릉(趙王陵)을 망라한 조 나라 문화 유적도 있어서 한단에서는 고대 건축예술의 매력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한단에는 내외에 이름을 널리 떨치는 종교 유적도 아주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명소가 바로 와황궁(媧皇宮)과 향당산(响堂山) 석굴이다. 향당산 석굴은 하북성에서 발견된 최대의 석굴이다.

남쪽의 석굴과 북쪽의 석굴 두 부분으로 구성된 향당산 석굴은 기원 500년대의 북제(北齊) 때 조성을 시작했다. 오늘날 16기의 석굴, 450여기의 마애조각, 4,300여기의 크고 작은 불상이 보존되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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