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2 10:19:5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23] 정정: 고건물의 보고

(사진설명: 아름다운 정정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스물 세 번째는 고건물의 보고 정정(正定)이다. 정정은 한 때 보정(保定), 북경(北京)과 함께 ‘북방의 3대 도시’에 들었고 “삼산(三山)은 산이되 산이 아니고, 구교(九橋)는 다리이되 흐르는 물이 없으며, 아홉 누각과 탑 넷, 여덟 사원, 패방(牌坊) 스물 넷을 거느린다.”

정정의 사원은 사원마다 전설의 사원이고 정정의 탑은 탑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정정에서 난 명인들은 모두 범상치 않은 경력과 레전드를 가지고 있다.

하북(河北) 성의 서북, 하북의 성도 석가장(石家庄)시에 속해 있는 정정은 태항산(太行山) 산발의 동쪽 기슭에 펼쳐진 벌판에 위치한,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성이다.

(사진설명: 어제와 오늘이 함께 하는 정정)

정정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춘추(春秋) 시기 정정은 선우국(鮮虞國)이었고 전국(戰國) 시기에는 중산국(中山國)이었으며 중산국이 월(越) 나라에 점령당한 후 조(趙) 나라에 속했다. 진(秦) 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정정은 항산군(恒山郡)에 속하고 한(漢) 나라 때는 이 곳에 동항현(東恒縣)을 두었다.

197년, 역모를 일으킨 한(漢) 나라의 장군 조리(趙利)가 동항을 차지했다. 이듬해 한고제(漢高帝)가 동항을 점령하고 나서 진정으로 천하를 평정했다는 의미에서 동항을 진정(眞定)이라고 개명했다.

그로부터 정정은 부(府)와 주(州), 군(郡), 현(縣)의 소재지가 되어 당시 북방의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연남(燕南)의 고도(故都)’, ‘경사(京師)의 병풍’이라 불렸다.

(사진설명: 정정고성의 성문)

정정은 보정, 북경과 함께 북방의 3대 도시라는 의미로 ‘북방삼웅진(北方三雄鎭)’에 들었으며 정정고성의 남쪽 성문에는 오늘날도 ‘삼관웅진(三關雄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청(淸) 나라 때인 1723년에 이르러 황제의 함자를 피해 진정(眞定)을 정정(正定)로 개명해 오늘에 이른다.

지하와 지상에 풍부한 문화재를 거느리고 독특한 민속을 유지하며 개성 있는 고건물을 보유한 정정은 고대의 건축구도와 전통적인 모양을 오늘날까지 유지하며 ‘고건물의 보고’라 불린다.

그 중 북주(北周) 시기에 축조된 정정고성의 성벽은 정정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직관적인 문화재이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정의 사회발전을 진실되게 기록한 성벽은 다수가 토성(土城)이다.

(사진설명: 정정고성의 성벽)

또 융흥사(隆興寺)와 임제사(臨濟寺), 문묘(文廟), 징령탑(澄靈塔), 수미탑(須彌塔), 능소탑(凌霄塔), 화탑(華塔) 등 많은 고건물과 이런 문화재에 깃든 이야기, 그리고 이 곳에서 난 역사인물들의 전기적인 경력은 정정에 두터운 문화적 기반을 형성했다.

완전하게 보존된 수(隨) 나라 때 사원인 융흥사는 586년에 신축했으며 처음에는 용장사(龍藏寺)라 부르다가 청(淸) 나라 때인 1709년에 융흥사라 개명했다.

사원에는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 명(明) 나라, 청나라 때의 서로 다른 풍격을 유지하는 고건물들과 구리 주조물, 조각, 벽화 등 불교예술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문화재는 본전 대비각(大悲閣)의 구리 불상인 정정 대보살(大菩薩) 상이다.

(사진설명: 개원사 종루와 수미탑)

북송 때인 968년에 주조된 이 불상은 천수(千手) 관음상이다. 높이 22.28m의 관음상은 42개의 팔을 가지고 있으며 손에는 해와 달, 정병(淨甁), 보장지팡이, 거울, 금강저 등을 들고 있다.

안온하면서도 자애롭고 정중한 표정의 관음상은 송나라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잘 보여준다. 이 천수관음상은 창주(滄州)의 사자, 정주(定州)의 탑, 조주(趙州)의 대석교(大石橋)와 함께 하북의 ‘4대 보물’로 인정된다.

동위(東魏) 때인 540년에 신축한 개원사(開元寺)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화재는 종루(鐘樓)와 수미탑이다. 벽돌과 나무로 지은 종루는 14m 높이에 2층으로 된 누각 모양의 건물이다.

(사진설명: 임제사 징령탑)

벽돌로 된 종루의 하단은 당 나라의 풍격을 띠고 있으며 목조건물로 된 종루의 상단은 수차에 걸친 보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 나라 건축양식을 유지한다.

개원사와 마찬가지로 동위 때인 854년에 신축한 임제사는 의현(義玄) 선사(禪師)가 이 곳에서 선종(禪宗)의 한 갈래인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한 것으로 유명해 내외 불교계로부터 임제종의 성지로 인정된다.

의현선사 원적 후 그의 제자들은 팔각형에 구층으로 된 사리탑을 축조했는데 당 나라 의종(懿宗)제가 ‘징령탑’이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정정에는 그 밖에도 당 나라 때 축조한 천령사(天寧寺) 능소탑과 광혜사(廣惠寺)의 화탑, 명(明) 나라 때의 성벽, 오대(五代) 때의 문묘 대성전(大成殿) 등이 예스러움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정정고성)

역사적으로 정정은 문화와 종교를 중시해서 일찍 상(商) 나라 때 벌써 학관(學館)을 두어 교육을 보급했고 서한(西漢) 후에는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풍기가 성행해 주(州)와 현(縣)에 모두 관가에서 차린 관학(官學)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민간에서 꾸린 사숙도 아주 많았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는 부학(府學)과 현학(縣學) 체제가 완비하고 서원(書院)과 사숙이 성행했다. 이로 인해 명나라 때는 한 가문에서 진사(進士) 셋이 나오기도 했으며 무술변법(戊戌變法) 후에는 또 새로운 학풍이 성행했다.

진(秦) 나라 후반의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와 삼국(三國) 시기 촉한(蜀漢)의 명장 조운(趙雲), 송나라의 장군 고회덕(高懷德), 원(元) 나라 연극가 백박(白朴), 사학자 소천작(蘇天爵), 청(淸) 나라 소장가 양청표(梁淸標) 등 역사적으로 많은 명인들도 정정 출신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정정고성)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적과 문화유산은 정정의 관광에 두터운 물질문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86년이래 정정은 많은 문화재에 기반해 끊임 없이 새로운 자원을 개발하면서 많은 새로운 명소를 조성했다.

그 중에는 중국 4대 고전소설 중 하나인 <홍루몽(紅樓夢)>에 나오는 영국부(榮國府)와 녕영가(寧榮街), 역시 중국 4대 고전소설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궁전, 그리고 봉신연의궁(封神演義宮), 탐험 랜드, 군사 랜드, 조운묘(趙雲廟) 등이 망라된다.

새로 조성된 이런 명소는 고성에 자리잡은 고대의 사원, 고대의 탑 등 문화재와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어 많은 사람들이 어제와 오늘이 함께 하는 정정을 찾아온다.

(사진설명: 정정고성의 야경)

정정의 민간전통예술도 아주 풍부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민간예술은 상산전고(常山戰鼓)라고 하는 북춤이다. 상산전고는 통상 20~100명의 고수(鼓手)들이 함께 북을 치며 춤을 춘다.

그들은 허리에 북을 하나씩 걸고 둥글게 원을 지어 돌면서 북을 친다. 원의 중앙에서는 한 사람이 징을 치며 북춤을 인도하는데 북채에는 채색의 띠가 달려 하늘거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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