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1 09:44:3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30] 韓城: 關中 문화재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한성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서른 번째는 관중(關中) 문화재의 도시 한성(韓城)이다. 강물을 마주하고 산 자락에 세워져 모두를 내려다 보며 웅장함을 자랑하는 사마천(司馬遷) 사당,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번영과 적막을 연출하는 고성의 골목, 살아 있는 고건물의 화석처럼 만질 수 있는 역사를 펼치는 당가촌(黨家村) 등이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보유한 한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관중분지와 섬북(陝北) 고원의 과도지대인 섬서(陝西)의 중부에 위치한 한성은 동쪽으로 황하(黃河) 강과 인접하고 서쪽으로 기복을 이룬 산발이 멀리 펼쳐진 유구한 역사의 고성이다.

한성은 유구한 역사, 풍부한 문화적 우위로 중국의 유명한 역사 문화도시에 입선되었다. 서한(西漢) 시기 유명한 사학자이자 문학가인 사마천이 이 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인해 한성은 또 ‘문학과 사학의 고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한성고성)

사관(史官)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사마천의 학술사상은 중국의 고대 사상문화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사마천의 조상은 주(周)나라 때부터 왕실의 태사(太史)직을 맡았다.

사마천은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장안(長安)에 이르렀고 20살 전에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풍속을 알아보고 전설을 수집했다. 그는 후에 흉노에 항복한 이릉(李陵) 장군을 변명을 한 일로 하옥되어 궁형을 받았다.

출옥 후 사마천은 사서편찬에 매진해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통사인 <사기(史記)>를 썼다. 이 사서는 ‘사학가의 절창, 리듬이 없는 이소(離騷)’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사진설명: 웅장한 사마천 사당)

사후 사마천은 오늘날 한성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지천진(芝川鎭) 동남쪽 둔덕에 묻혔고 한성인들은 사마천을 기리기 위해 사마천의 무덤 근처에 사당을 지었다.

동쪽으로 황하강을 바라보고 뒤에 양산(梁山)을 업은 아늑한 둔덕에 자리잡은 사마천의 무덤 앞으로는 지천강이 흐른다. 둥근 봉분의 높이는 2.15m, 둘레는 13.19m에 달하고 무덤에는 꿈틀거리는 용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자란다.

서진(西晉) 때인 210년에 세운 사마천 사당은 헌전(獻殿)과 침궁(寢宮) 등 건물을 거느리며 건물에는 1700여년 전 송(宋) 나라 때 빚은 사마천의 좌상이 공양되어 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한성고성)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한성고성은 오늘날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용의 모양을 본뜬 주요 거리는 고성의 남북을 관통하는데 거리 북쪽에 솟은 탑은 용의 머리를 방불케 하고 1,000m가 넘는 구불구불한 거리는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거리 남쪽 끝의 석교는 용의 꼬리를 방불케 한다.

주요 거리의 양쪽과 동서남북 네 방향에 설치된 관문을 서로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도로는 40여갈래에 달한다. 이런 도로들 사이로는 청(淸)나라 때 장원 급제한 왕걸(王杰)의 저택을 망라해 지방특색이 짙은 민가건물이 뭇 별처럼 산재해 있다.

한성의 민가는 주로 명(明)나라와 청나라 때의 사합원(四合院) 건물로 되어 있다. 독특한 구도와 정교한 조각, 높은 건축기법이 북경(北京)의 사합원과 유사해 한성은 일명 ‘작은 북경’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진설명: 당가촌의 골목)

한성민가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한성고성 동쪽으로 10km 거리에 있는 당가촌(黨家村)이다. 중국 북방에서 가장 대표적인 민가의 마을인 당가촌은 ‘세계 민가의 보물’, ‘인류문명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한성이 ‘관중 문화재의 도시’라 불리게 된 데는 독특한 특색의 민가들 때문인 동시에 완전하게 보존된 당(唐), 송(宋), 원(元), 명 청 시기의 고건물 140여 곳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문화재가 집중된 것은 섬서에서 한성이 으뜸이다.

진(晉) 나라 때 신축된 사마천 사당 외에 당나라 때 신축한 미타사(彌陀寺), 송나라 때의 법왕묘(法王廟), 금(金)나라 때의 탑, 원나라 때의 대우묘(大禹廟)와 보조사(普朝寺), 성황묘(城隍廟), 명나라 때의 문묘(文廟), 청나라 때의 육수교(毓秀橋) 등 고건물들은 조화로운 구도와 웅장한 모습, 정교한 조각으로 전통건물의 풍모를 그대로 펼쳐 보인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문묘)

한성 문묘는 섬서에 남아 있는 13세기 이래 가장 대표적인 고건물 중 하나로 관중지역에서 명성이 제일 높다. 문묘는 명나라 때인 1371년에 축조되었으며 8,100㎡의 건축면적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세 번째로 규모가 큰 공자사당(孔廟)이다.

영성문(欞星門)과 극문(戟門),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존경각(尊經閣) 등 5채의 건물, 그리고 건물주변에 조성된 4개의 뜰로 구성된 문묘에 들어서면 유리기와로 쌓은 길이 17m, 높이 4.2m의 정교한 오룡벽(五龍壁)이 맞이해준다.

오룡벽의 뒤에 영성문이 있고 문의 상단에 문묘 편액이 걸려 있다. 영성문에서 극문까지 사이에는 하늘을 찌르는 고목이 줄지어 있고 연못과 석교가 조화를 이루며 석교를 지나면 고목의 숲 양쪽에 모양이 상이한 6개의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당가촌)

한성고성을 나와 10km 가면 유명한 당가촌에 이른다. 당가촌 옆의 언덕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면 좁고 긴 조롱박 모양의 골짜기에 구도가 엄밀하고 예스러운 모양을 한 높고 낮은 고건물들이 질서 있게 자리잡고 있다.

마을의 남쪽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시냇물의 양쪽에는 과수원과 채소밭이 펼쳐져 있으며 마을의 주변에는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나뭇잎이 바람에 설레며 듣기 좋은 소리를 낸다.

(사진설명: 당가촌의 건물)

당가촌은 외관은 비슷하나 내부 구조는 서로 다른 120여 채의 사합원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거느린 이런 건물들은 서로 가까이 있거나  혹은 서로 좀 떨어져 조화를 이루며 보기 드문 인문경관을 형성한다.

외국의 건축전문가들은 중국에서 보기 드문 명청시기의 고대 마을인 당가촌을 ‘동양인류가 살던 고대 전통 마을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평가하며 ‘세계의 건축문화는 중국에 있고 중국의 민가건축은 한성에 있다’고도 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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