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09:11:0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31] 곡부: 공자의 고향

(사진설명: 아름다운 곡부)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서른 한 번째는 공자(孔子)의 고향 곡부(曲阜)이다. 성인(聖人) 한 명이 성스러운 도시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도시가 바로 2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양의 메카’ 곡부이다.

곡부라는 지명은 온 세상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은 도시가 세계에 명성을 날리게 된 것은 곡부가 풍부한 인문 성과를 보유하고 유가(儒家) 문화를 잉태한 성인(聖人) 공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산동(山東) 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한 곡부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과 눈부신 동양의 고(古) 문화로 인해 내외에 이름이 자자하다. 기나긴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곡부는 줄곧 사람들 마음 속의 성지였고 서구인들은 곡부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곡부)

중국의 문명사에서 곡부는 대체불가의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전한데 의하면 전설 중 상고시대의 제왕들인 염제(炎帝)와 황제(黃帝), 소호(少昊) 등이 모두 곡부에 도읍을 두었으며 이로 인해 곡부는 ‘소호의 페허’라 불리고 오늘날까지도 소호릉을 보존하고 있다.

상(商) 나라 때 이 곳은 엄(奄) 나라의 소재지였고 상나라 제18대 왕 남경(南庚)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기도 했다. 그 후 상나라의 제20대 왕 반경(盤庚)이 도읍을 은(殷), 오늘날의 하남(河南) 안양(安陽)으로 옮겼다.

주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멸하고 동족과 공신들을 봉하면서 주공단(周公旦)이 곡부를 봉지로 받고 이 곳에 노(魯)나라를 세웠다. 건국에서부터 기원전 249년 초(楚) 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노나라는 도합 34대에 걸쳐 800여년 간 존속했다. 이는 주(周) 왕조의 여러 제후국 들 중 가장 오래 존속한 나라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곡부고성)

지금까지 보존된 노나라 옛 성터를 보면 노나라의 고성(故城)은 동서 길이가 약 4km, 남북 너비 약 3km에 달한다. 둘레 12km의 성벽에는 도합 11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모든 성문은 곧게 뻗은 거리로 연결되어 있다.

엄격하게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라 축조된 곡부성(曲阜城)에는 중심선이 곧게 뻗어 있고 중심선의 왼쪽에 조묘(祖廟), 오른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두었으며 앞쪽에 관가 건물이 있고 일반인들의 주택은 뒤쪽에 두었다.

도심의 중부는 궁전(宮殿)구역으로 궁전의 앞쪽에 남문까지 통하는 거리가 있으며 궁전 구역의 동쪽과 서쪽, 북쪽에 동과 철을 제련하고 도자기와 골(骨) 제품을 만드는 작업방이 있으며 무덤은 서북쪽에 집중되어 있다.

(사진설명: 공자의 석상)

중국에는 ‘강남(江南)에서는 재자(才子)가 나고 강북(江北)에서는 성인(聖人)이 난다’는 말이 있는데 강북의 성인은 다수가 곡부에서 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성인이 바로 곡부에서 태어난 공자이다.

공자는 춘추(春秋) 후반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자이며 유가학설의 창시자이다. 공자학설은 고대 중국의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사상을 이끌어냈으며 많은 학파가 나온 전국(戰國)시기 백가쟁명(百家爭鳴) 중 실력이 있는 학파 중 하나가 되었다.

2천 년 동안 공자학설은 중국인들의 사상과 행위의 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각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쳐 동양인들의 품격과 심리의 이론적 기반이 되어 동양문화의 초석을 형성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공묘)

공자학설의 영향으로 유가학설의 발원지, 유교(儒敎)의 근원지로 인정되며 ‘동양의 메카’라 불리는 곡부 곳곳에서는 유가 특색의 노(魯) 문화가 바로 이 곳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공묘(孔廟)는 공자가 죽은 이듬해 노애공(魯哀公)이 공자의 세 칸짜리 생가를 개조해 만든 것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해마다 이 곳에서 공자를 기렸으며 그 뒤에 역대의 왕조가 끊임 없이 공자를 추가 책봉하고 끊임 없이 공묘를 증축하면서 공묘의 규모도 점점 확대되었다.

규모가 웅장하고 눈부시게 화려한 오늘날 공묘는 명(明) 나라 때 형성된 규모와 모습을 유지한다. 부지 327무(亩, 1무=666.6㎡)에 달하는 공묘는 단면이 장방형이며 남북길이가 1,120m에 달한다. 도합 아홉 겹의 뜰에 466채의 건물이 남북방향의 중심선 양쪽에 대칭되게 자리잡고 있다. 황궁을 모방한 공묘는 중로(中路)와 동로(東路), 서로(西路)의 구도로 위치와 예제(禮制)의 질서를 보여준다.

(사진설명: 공묘의 웅장한 대성전)

공자의 사당인 공묘와 공자의 저택인 공부(孔府),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을 삼공(三孔)이라 한다. 곡부의 중심이 삼공이라면 공묘는 바로 이 삼공의 핵심이고 대성전(大成殿)은 바로 공묘의 핵심이다.

당(唐) 나라 때 이 전각은 공자의 칭호와 더불어 ‘문선왕전(文宣王殿)’이라 불렸으며 북송(北宋) 때인 1021년 대 규모 수건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른다. 송휘종(宋徽宗)이 ‘공자의 말씀을 집대성했다’는 의미를 따서 ‘대성전’이라는 이름을 하사해 그 이름이 오늘까지 사용된다.

대성전의 앞쪽에는 높이 12.05m, 너비 7.37m의 모난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중으로 된 노란 지붕에 붉은 기둥을 한 이 건물은 공자가 생전에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공부)

공묘의 동쪽에 위치한 공부(孔府)는 큰 규모의 저택이다. 이 곳은 공자의 ‘연성공(衍聖公)’ 작위를 세습한 공자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자 중국에서 명(明) 나라와 청(淸)나라 때 황궁에 버금가는 최대 규모의 저택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공부는 명나라 때 확정한 규모를 유지하며 그 뒤 청나라 때 또 다양한 건물 463칸을 증축했다. 공부에는 또 명나라 때인 1534년부터 1948년까지의 엄청난 양의 공부 관련 서류가 보존되어 있다.

이런 서류들은 상이한 시각에서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중화민국(中華民國)시기의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상황을 잘 보여주어 중국 봉건사회 후반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역사 자료가 되었다.

(사진설명: 아늑한 공림의 일각)

공자와 그 자손들이 묻힌 공림(孔林)은 현재까지 2400여년 동안 이어져 온다. <사기(史記)>에는 공자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이 그를 ‘노성북사상(魯城北泗上)’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漢) 나라 때부터 공자의 위상이 향상되면서 공림의 규모도 점점 더 확대되어 선후로 16회에 걸쳐 공림을 개축하고 5회에 걸쳐 나무를 심어 현재 공림에는 나무 10만 그루가 자라고 숲 속에는 76대까지 이르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의 무덤 10만 여기가 산재해 있다.

공림이 가족무덤으로써 2천여년 동안 종래로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며 완전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또 비석이 숲을 이루고 묘비 2,000여기가 보존된 공림은 중국의 유명한 비림(碑林) 중 하나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훌륭한 자연 박물관이자 공씨 가문의 편년사(編年史)이기도 하다”고 공림을 평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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