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7 09:58:4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35] 승덕: 여유로운 제왕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승덕)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서른 다섯 번째는 여유로운 제왕의 도시 승덕(承德)이다. 원래 이름 없는 작은 도시였던 승덕은 피서산장(避暑山莊)과 외팔묘(外八廟)로 인해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드넓은 중국의 산천은 동서남북 다양한 특징을 자랑한다. 수려한 남방의 경치와 웅장한 북방의 경관, 아늑한 동쪽의 경치, 기이한 서쪽의 경관을 한 몸에 모은 승덕은 그야말로 축소판 중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북(河北)의 동북부, 란하(滦河)와 무열하(武烈河) 두 줄기 강물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승덕은 수려한 남방의 경치와 웅장한 북방의 경관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승덕)

1681년 청(淸) 왕조는 남방에서 삼번(三藩)의 난을 평정한 후 정치적인 수요에 의해 조정의 주의력을 북방으로 옮겼고 고북구(古北口) 외곽에 군대를 훈련시키는 위장(圍場)을 두었다.

1702년부터는 또 청 왕조의 도읍인 북경(北京)에서 승덕위장까지의 사이에 8개의 행궁(行宮)을 건설했다. 그 전에 승덕은 열하상영(熱河上營)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강희(康熙) 제는 지세와 기후가 좋고 경치도 아름다운 승덕이 청 왕조의 발상지인 북방으로 직통하는 청왕조 고향의 관문인 동시에 산해관 남쪽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몽골의 여러 부락을 통제할 수 있는 곳임을 발견하고 이 곳에 황실의 행궁인 피서산장(避暑山莊)을 짓기로 결정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피서산장)

승덕 피서산장은 강희제 때인 1703년에 축조를 시작해서 1708년에 초보적인 규모를 갖추었으며 건륭(乾隆)제 때인 1790년에 공사를 전부 완공했다. 피서산장은 80년에 걸쳐 건설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청나라 황실정원이다.

부지 564헥타르에 달하고 124세트의 건물이 있는 피서산장은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 정원에 모으고 하늘과 땅을 한 곳에 축소시킨’ 제왕사상을 잘 구현한다.

피서산장은 궁전구역과 정원구역으로 나뉜다. 산장의 남쪽에 위치한 궁전구역은 정궁(正宮)과 송학재(松鶴齋), 동궁(東宮), 만학송풍(萬壑松風) 등 네 개 건물의 군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설명: 피서산장의 궁전구역)

청 왕조 황궁인 자금성(紫禁城)의 축소판인 피서산장 궁전구역은 청나라 황제가 여름이면 대신들을 거느리고 이 곳에 옮겨와 더위를 피하면서 국사를 보고 축제를 가지던 장소이다.

호수와 산악지대, 벌판으로 분류된 정원구역은 중국 정원의 조경사상을 이어 받은 동시에 자연의 지세를 빌어 남방의 수려한 경관과 북방의 웅장한 경관을 한 정원에 모았다.

승덕피서산장의 정문 앞에는 신기한 홍조벽(紅照壁)이 있다. 전한데 의하면 사람들이 이 가림벽 앞에서 발을 구르고 나서 벽에 귀를 대면 벽 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사진설명: 신기한 홍조벽)

이 홍조벽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200여년 전 계관산(鷄冠山) 기슭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이상하게 매일 밤이 되면 뒷산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 노인은 닭 울음소리를 따라 한 동굴 앞에 이르러 노란 암탉이 병아리들을 거느리고 먹이를 찾는 것을 발견했다. 그 광경을 본 노인은 매일 자신이 먹고 남은 좁쌀을 조용히 동굴 앞에 가져다 뿌렸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닭은 노인과 친해져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후에 노인은 황제의 행궁을 축조하는데 동원되어 닭 모이를 주는 일을 그곳에 머물던 한 나그네에게 부탁하며 절대로 닭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피서산장)

그런데 닭모이를 주던 나그네는 이 닭들이 모두 황금 닭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먹이를 먹을 때 닭을 잡으려 시도했다. 병아리들은 어미 닭의 도움으로 동굴로 들어갔지만 어미 닭은 미처 동굴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달음에 행궁 공사장으로 달려갔다.

마침 가림벽을 쌓던 노인은 암탉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불행한 일이 발생했음을 알고 즉시 암탉을 지켰다. 그로부터 홍조벽에서 울려 나오는 금계(金鷄)의 울음소리는 노인이 정으로 돌을 쫓는 소리와 조화를 이루었다.

피서산장이 건설되면서 청나라 황제들은 해마다 여름부터 짧아서 4,5개월, 길때면 6개월씩 산장에 머물렀다. 또한 해마다 황실성원 외에도 많은 대신과 시종들도 승덕에 이르렀다.

(사진설명: 승덕의 일각)

일부 귀족과 대신들은 해마다 황제를 동행해야 하자 아예 산장 근처에 자신의 저택을 짓기도 했다. 심지어 몽골족의 일부 귀족들도 이 곳에 정착하면서 피서산장은 청 왕조의 두 번째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

피서산장의 건설과 함께 지방 행정기관도 점차 승덕에 입주하기 시작했다. 1723년 지방행정기관인 열하청(熱河廳)이 세워지고 1733년 열하청은 승덕주(承德州)로 개명했으며 이로부터 승덕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승덕의 흥기는 피서산장과 동반한다. 피서산장이 없으면 승덕이 있을 수 없다. 피서산장이 세워지고 인구가 많아지면서 상업이 활성화되어 열하상영이라 불리던 작은 마을 승덕에는 다양한 상품을 경영하는 온갖 가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외팔묘 중 하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승덕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마차가 길을 메우며 술집과 다실이 즐비한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다. 1778년 건륭제는 어지(御旨)에 “열하는 황조(皇祖)께서 산장을 세우신 이래 60여년이 흘러 지금 가구가 날로 늘고 농사와 양잠이 날로 발전하는 엄연한 대도시가 되었다”고 적었다.

피서산장 주변의 산중에는 12개의 금빛으로 눈부신 사원이 달을 둘러싼 별처럼 산장을 중심으로 주변에 산재해 있다. 이런 사원은 당시 청나라 조정이 몽골과 신강(新疆), 티베트 등 지역의 소수민족을 단합하고 변경지역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종교적 수단으로 피서산장 주변에 지은 것이다.

12개 사원은 8개 사원을 청나라 조정이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외팔묘(外八廟)’라 이름한다. 한(漢)족과 만(滿)족, 몽골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다양한 민족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외팔묘는 다민족 국가의 발전과 민족문화 융합의 증명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목란위장)

그 중 1780년에 지은 수미복수(須彌福壽)는 외팔묘 중 가장 마지막에 신축한 사원이다. 마침 건륭제가 칠순을 맞이하고 티베트 정권의 두령인 벤첸 6세가 먼 길도 마다하고 승덕에 이르러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되어 건륭제는 티베트 사원을 본뜨고 한족 사원의 풍격도 가미해서 사원을 축조하라고 명했다.

사원에는 석가모니상과 나한상이 공양되어 있으며 만법종원전(萬法宗源殿)은 벤천의 침전이고 그 뒤의 금하당(金賀堂)은 벤첸의 제자들이 머물던 곳이다.

피서산장 외에 승덕관광에서는 또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큰 황실사냥터 목란위장(木蘭圍場),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목제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상,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돌기둥의 바위산 경추봉(磬錘峰)도 빼놓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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