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0 11:10:2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36] 양주: 아름다운 봄날의 도시

(1-사진설명: 아름다운 양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서른 여섯 번째는 아름다운 봄날의 도시 양주(揚州)이다. ‘꽃피는 삼월 양주로 가네(煙花三月下揚州)’ ‘천하의 달 밝은 밤을 셋으로 나눈다면(天下三分明月夜) 그 중의 둘은 어김없이 양주의 몫이라네(二分無賴是揚州)’…천 년이 넘는 세월 양주를 노래한 이런 시들은 부지기수이고 또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양주에 짙은 시적 분위기를 가미한다.

양주의 명승고적과 우아한 정원, 꼬불꼬불한 골목과 제왕들이 거쳐갔던 흔적은 언제 어디서나 모두 번화함의 극치를 자랑했던 양주의 눈부신 어제를 말해준다.

강소(江蘇)의 중부, 장강(長江) 하류의 북쪽 기슭, 회수(淮水) 강의 남쪽 기슭, 운하가 하천에 흘러 드는 곳에 위치한 양주는 예로부터 강소 북부의 관문이자 남북 교통의 요충지였다.

(사진설명: 양주의 물길)

양주는 역사적으로 번화한 도시이자 강회(江淮) 문화의 중심지와 대외 교류의 중요한 항구이며 경치가 수려한 정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경치가 아름답고 교통이 편리한 양주는 역사도 유구하다.

기원전 486년 제(齊) 나라를 토벌하고 중원(中原)을 차지한 오(吳)왕 부차(夫差)는 기존의 한(邗)나라 유적에 장강과 회하를 연결하는 물길을 뺐다. 150km 길이의 한구(邗溝)라 이름의 이 물길은 중국 최초의 운하이다.

이와 동시에 한구의 서남쪽, 오늘날 양주의 북쪽 교외에 한성(邗城)을 축조했다. 성의 둘레 6km에 달하는 이 성의 서쪽과, 북쪽, 동쪽에는 해자를 파서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사진설명: 대운하의 양주구간)

그 후 수양제(隋煬帝)가 한구를 확장해 중국 역사상 길이가 가장 긴 경항(京杭) 대운하를 건설했고 그로부터 양주는 중국 수륙교통의 허브이자 동남지역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또 당시 통상과 국제교류의 중요한 항만이었던 양주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머물러 일본과 고려, 페르시아, 아랍인을 비롯한 외국인의 숫자가 천 명을 웃돌았다.

그 뿐이 아니다. 중국 각지에서 양주에 와서 사업을 하고 무역을 경영하던 사람들이 아예 양주에 눌러 앉아 많은 곳에 아름답고 아담한 정원을 조성해 최고로 양주에는 크고 작은 정원 170여곳이 있었고 오늘날까지 보존된 정원은 하원(何園)과 개원(个園), 편석산방(片石山房), 이려(怡廬), 울원(蔚園)을 망라한 30여 곳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수서호)

양주시 서쪽 교외에 위치한 수서호(痩西湖)는 정원과 정원을 연결하고 각자 특색을 자랑하는 연우루(煙雨樓)와 소금산(小金山), 오정교(五亭橋) 등 축조물을 거느리며 자연과 인문의 조화로운 그림을 그린다.

수서호는 원래 수나라 때 성곽의 해자였는데 후에 해자와 운하가 연결되며 호수가 되었다. 그러면서 수서호는 단순한 방어용의 해자로부터 경치가 수려한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수서호의 수면은 구불구불 펼쳐지며 혹은 시원하게 트이고 혹은 물길이 좁아지며 다채로운 경관을 자랑한다. 청(淸)나라 시인 왕항(汪沆)은 “호숫가의 수양버들 저 멀리까지 뻗어 있고, 그림 같은 계단 무지개 다리까지 닿았네. 번화한 여기는 돈 쓰기도 좋은 곳, 마땅히 수서호라 이름함이 좋으리”라는 시를 썼다.

(사진설명: 아늑한 개원)

사계절 다양한 동산으로 유명한 정원 개원(个園)은 양주고성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청나라 때 소금업을 경영하던 갑부 황지균(黃至筠)의 개인 정원인 개원에는 대나무가 많고 대나무 잎 모양이 한자로 개(个)와 비슷하다고 해서 개원이라 이름했다.

개원은 상이한 색깔의 돌로 네 개의 동산을 쌓아 일년 사계절을 교묘하게 표현한다. 봄날의 동산은 푸른 숲이 주를 이루고 여름의 동산은 연꽃이 화사한 연못, 가을의 동산은 부드러운 석양을 보여주며 겨울의 동산은 하얀 사자를 방불케 한다.

다양한 색상의 바위로 동산을 쌓아 춘하추동을 보여주고 서로 다른 조경법으로 일년 사계절을 형상적으로 보여주는 개원의 정원 조경 수법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다.

(사진설명: 아늑한 하원)

‘도시의 숲’이라 불리는 하원(何園)은 양주시 광릉(廣陵)구 서응문(徐凝門) 거리 77번지에 위치해 있다. ‘기소산장(寄嘯山莊)’이라 불리기도 하는 하원은 청나라 때 관리의 개인 정원이다.

이 밖에도 양주에는 문화유적이 아주 많다. 춘추(春秋) 시대의 운하와 한(漢) 나라 광릉왕(廣陵王)의 무덤, 남북조(南北朝) 시기의 사원 대명사(大明寺)가 있으며 수(隨) 나라 때의 미궁과 양제릉(煬帝陵)도 보존되어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당(唐) 나라 성터, 송(宋) 나라와 원(元) 나라 때의 무덤, 유명한 이슬람 사원인 선학사(仙鶴寺) 등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자랑하는 명소들이 양주고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대명사)

소나무 울창한 산 중턱에 자리잡은 대명사는 남송(南宋) 때의 유명한 사찰이다. 종교구역과 문인묵객구역, 동(東)화원구역, 서(西)화원구역으로 나뉘는 사원은 대웅전과 평원루(平遠樓), 평산당(平山堂), 어원(御園), 감진(鑒眞) 기념당, 서령탑(栖靈塔) 등으로 구성되어 웅장한 건물과 아름다운 꽃나무, 울창한 숲을 자랑한다.

경제가 번영하고 교통이 편리한 양주는 문화의 번창도 가져와 역대로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당나라 때만 해도 반수 이상의 대표적인 시인들이 양주에서 출생했거나 양주에 머물렀다.

또 기록에 의하면 양주에 발자국을 남긴 문인과 묵객은 당나라 시인들인 이백(李白)과 맹호연(孟浩然), 백거이(白居易), 송(宋) 나라 교육자인 유우석(劉禹錫), 송나라 개혁가 왕안석(王安石), 송나라 시인 소식(蘇軾), 원(元)나라 극작가 관한경(關漢卿), 명(明) 나라 문학가 탕현조(湯顯祖), 청(淸) 나라 시인 공자진(龔自珍) 등 500여명에 달하며 그들을 양주를 노래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진설명: 양주의 백탑)

양주에는 지금까지도 ‘하루 밤 사이에 탑을 쌓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의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건륭(乾隆)제가 수서호를 유람하다가 오정교에 이르러 갑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 곳은 경성(京城) 북해(北海)의 경도(京島)와 흡사한데 딱 하나 유감이라면 백 탑이 없구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건륭제가 수서호 기슭에 위치한 행궁의 창문을 여니 오정교 옆에 백 탑 하나가 솟아 있었다.

건륭제가 하늘이 하루 밤 사이에 백 탑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내시가 아뢰었다. “현지의 소금업자가 폐하의 아쉬움을 덜어드리고자 어제 밤새 축조한 탑이옵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오정교와 백탑)

8대 소금업자 중 한 사람인 강춘(江春)이 거금을 들여 건륭제를 보좌하며 경성 백 탑의 모양을 그림으로 받은 후 하루 밤 사이에 그 그림에 따라 소금포대로 탑의 기단을 쌓고 탑신은 종이 공예로 만들었다.

멀리서 바라볼 수만 있고 가까이 다가가서 등반할 수 없는 탑이지만 경성의 백 탑과 모양이 같은 백 탑을 바라보며 건륭제는 “이 세상의 갑부가 양주에 있다더니 명불허전이로군” 라고 감탄하며 칭찬했다.

양주의 문화와 예술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그 종류도 아주 많은데 양주에는 서예와 그림의 대가들이 특히 많다. 일찍 한(漢)나라 때 양주에는 황상(皇象)과 같이 최초로 사서에 기록된 서예가가 있었다.

(사진설명: 양주의 서예)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 양주는 점차 중국에서 문화예술이 앞서가는 지역으로 부상해 진관(秦觀)을 비롯한 서예가들의 작품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이사훈(李思訓) 등 화가들의 작품도 각자 특징을 자랑했다.

청나라 때에 이르러 양주에는 직업 화가들이 대거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화가들이 바로 ‘양주팔괴(揚州八怪)’라 불리는 김농(金農)과 황신(黃愼), 정섭(鄭燮), 이선(李鳝), 이방응(李方膺),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나빙(羅聘)이다.

양주팔괴는 생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림을 그릴 때 통념이나 관행을 따르지 않고 이상한 그림들을 그렸다. 거기다가 그들의 성격 또한 개성이 강하고 도고해서 양주팔괴라 불렸다.

(사진설명: 양주팔괴 기념관)

하지만 박식하고 경력이 풍부하며 예술적 소양이 높고 그림기법과 창조적인 예술을 추구하는 그들은 다른 화가들처럼 기존의 형식을 따르는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의 새로운 경지와 새로운 구도,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며 참신한 화풍(畵風)을 형성해 중국화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양주시 유양(維揚)구 타령(駝嶺) 골목 18번지에 위치한 양주팔괴기념관(揚州八怪記念館)은 여덟 화가의 작품을 전시한다. 기념관에는 또 그들의 작품을 새긴 비석과 정자 등 명소가 있으며 김농의 작업실을 복원해 놓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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