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9 09:26:5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43] 금화: 신선이 노니는 명승

(사진설명: 아름다운 금화)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마흔 세 번째는 신선이 노니는 명승 금화(金華)이다. ‘듣자니 쌍계의 봄은 아직 좋다지요(聞說雙溪春尙好) 일엽편주 띄우고 싶으나(也擬泛輕舟) 쌍계의 작은 거룻배 하나로(只恐雙溪艋舟) 이 많은 수심 다 실을 수 있을는지 두렵구려(載不動許多愁)’.

남송(南宋)의 여류 사인(詞人) 이청조(李淸照)의 이 시에 나오는 ‘쌍계’가 바로 동양강(東陽江)과 무의강(武義江)이 합류한 후 이름하는 무강(婺江)을 말한다. 옥으로 만든 벨트처럼 금화성을 감돌아 흐르는 이 무강으로 인해 금화는 ‘산과 물의 도시, 신선이 노니는 명승’이라는 미명을 가진다.

절강(浙江)의 중서부에 위치한 금화는 18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북쪽의 금화산(金華山)과 남쪽의 선하령(仙霞嶺)이 경치도 수려하고 물산도 풍부한 이 땅을 감싸 안아 금화고성은 양쪽에 두 산이 막아서고 강물 한 갈래가 동반하는 구도를 형성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금화)

좋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금화에는 자연자원과 인문자원이 아주 풍부하다. 국립 명소가 된 쌍룡동(雙龍洞)은 벌써 내외에 이름이 자자하고 성립 명소들인 영강방암(永康方岩)과 난계육동산(蘭溪六洞山) 지하 물길, 포강선화산(浦江仙華山), 무의곽동(武義郭洞), 반암화계(磐岩花溪), 탕계구봉상(湯溪九峯山) 등이 각자 다양한 산수를 자랑한다.

또 태평천국(太平天國) 시왕부(侍王府)와 송(宋)나라 때 절인 천녕사(天寧寺), 팔영루(八咏樓), 오봉서원(五峰書院) 등 인문명소들, 그리고 제갈팔괘촌(諸葛八卦村), 유원태극촌(兪源太極村)을 비롯한 신비한 마을들, 동양(東陽) 노택(盧宅)이 발길을 잡는다.

금화성에서 북쪽으로 8km 거리의 북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쌍룡동은 산악과 숲을 배경으로 하고 지하 물길과 용암경관을 특색으로 하는 관광명소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쌍룡동)

쌍룡동은 상중하 3층으로 되어 있다. 제일 하단의 동굴이 쌍룡동이고 그 위의 가운데 동굴이 빙호동(氷壺洞), 제일 위의 동굴이 조진동(朝眞洞)이다. 동굴 속에는 또 황대선조궁(黃大仙祖宮)도 있다.

제일 하단의 쌍룡동은 또 내동(內洞)과 외동(外洞) 두 개의 동굴로 나뉘는데 그 중 밖에 있는 외동은 동굴의 높이가 66m, 길이와 너비가 각각 33m에 달해 넓은 그 동굴에 들어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돌로 된 탁자와 의자 등이 줄지은 이 동굴에는 무더운 여름이면 더위를 피할 수도 있는데 최다로 천 명이 함께 모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외동에서 내동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작은 배를 이용해야 한다.

(사진설명: 쌍룡동의 물길)

외동과 내동 사이를 흐르는 지하 물길 위에 거대한 바위가 막아 서 있으며 바위의 하단과 수면 사이의 공간은 한자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두 동굴을 오가려면 반드시 작은 배를 이용해야 하고 바위를 지날 때는 앉거나 서지 못하고 배 위에 반듯이 누워 바로 눈앞으로 흘러가는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배를 타고 흐르면 삼면에 바위가 막아 서서 눈앞은 칠흑같이 어둡고 주변에서는 쪽배가 물을 가르는 소리만 들리고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렇게 한 30자 정도 나가면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며 비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외동에 비해 규모가 두 배에 달하는 내동에 들어서면 높은 천정에서 청색의 종유석과 황색의 종유석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굴 바닥에까지 뻗어 꿈틀거리는 두 마리의 용을 방불케 한다. 쌍룡동이라는 이름도 이곳에서 기원한다. 이 동굴에는 그 밖에도 석순을 비롯한 다양한 모양의 종유석이 현란함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시왕부)

태평천국(太平天國) 후반의 장군이었던 시왕(侍王) 이세현(李世賢)은 1861년 금화를 점령한 후 금화성의 동쪽에 시왕부(侍王府)를 신축하고 당시 절강의 군 지휘부로 삼았다.

전각과 주택, 정원, 병참보급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된 시왕부는 옆에 넓은 연병장도 거느린다. 부지가 63,000㎡, 건평이 3,000㎡에 달하는 시왕부는 전체를 동원(東院)과 서원(西院)으로 나눈다.

시왕부는 현재까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고 벽화예술이 가장 풍부하며 건축규모가 가장 큰 태평천국 시기의 유적으로 태평천국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금화의 예스러운 성문)

금화는 예로부터 예의의 고장이기도 해서 역사적으로 강학의 붐이 일고 서원(書院)을 많이 세웠다. 문화와 교육을 중시하면 명인이 배출되기 마련이여서 금화도 예외가 아니다.

금화에서는 ‘초당사걸(初唐四傑)’ 중 한 명인 낙빈왕(駱賓王)과 오대(五代) 시승(詩僧)이자 서예가인 관휴(貫休), 송(宋)나라 명장 종택(宗澤), ‘영강학파(永康學派)’의 대표인물들인 여조겸(呂祖謙)과 진량(陳亮), 근현대 중국화의 대가 황빈홍(黃賓虹), 현대 시인 애청(艾靑) 등 명인들이 났다.

오늘날에도 금화의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이루고 해외에 나가서 금화에서는 ‘박 사 백 명이 한 도시에 모이고 교수 천 명이 한 고향 출신이다’라는 미담이 전해진다.

(사진설명: 먹음직한 금화햄)

금화 쌍룡동이 사람들에게 시각적 향연을 선사한다면 금화햄(金華火腿)은 미각적 향수를 누리게 한다. 금화 최고의 특산물인 금화햄은 색깔이 노랗고 모양은 비파와 같으며 향이 짙고 영양분이 풍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색상과 향, 맛, 모양’이 모두 좋은 금화햄은 천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역대로 황궁에 들어가는 공물이었고 현재는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미식의 한 가지가 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금화)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로 인해 금화는 다채로운 민족풍토도 형성했다. 다채로운 금화 희곡 중 4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극(婺劇)은 금화문화예술의 대표로 호방한 음색과 독특한 창법, 풍부한 고악(鼓樂), 뛰어난 무공(武功)을 특색으로 한다.

1962년 절강 무극 <단교(斷橋)>가 북경(北京)의 무대에 올랐는데 주은래(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로부터 ‘천하 제일의 다리’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금화에는 소싸움과 용등 놀이 등 다양한 민속풍토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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