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27 09:04:2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49] 악양: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악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마흔 아홉 번째는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악양(岳陽)이다. 명산과 유명한 하천, 건물, 문장, 명인을 한 몸에 모은 악양은 내외에 이름이 자자한 악양루(岳陽樓)와 푸른 물 찰랑이는 동정호(洞庭湖), 푸른 군산(君山)이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자랑한다.

옛적에 파릉(巴陵), 악주(岳州)리 불린 악양은 호남(湖南)의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악양의 지세는 동정호를 향해 계단식으로 낮아지며 동쪽은 구릉이고 서쪽은 벌판이다.

25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악양은 예로부터 ‘호북의 관문’이라 불렸다. 상(商)나라 때 악양은 고대 중국의 한 부족인 삼묘(三苗)의 집거지였고 춘추(春秋)시기에는 초(楚)나라에 속했다. 주(周)나라 때인 기원전 505년 성을 쌓기 시작해 현재 악양성의 규모로 발전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동정호)

동정호(洞庭湖), 남호(南湖), 파초호(芭蕉湖), 동풍호(東風湖), 송양호(松楊湖) 등 165개의 호수와 장강(長江), 신장하(新場河), 상강(湘江), 멱라강(汨羅江) 등 265갈래의 하천을 거느린 악양은 물길이 얼기설기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북쪽으로 장강과 연결된 동정호는 중국 제2의 담수호로 ‘팔백리 동정’이라 불린다. 호수 밖에 호수가 있고 호수 속에 섬이 있는 동정호는 가까이에서 보나 멀리서 보나, 춘하추동 일년 사계절 모두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소상팔경(潇湘八景) 중 가을 호수에 달 밝은 ‘평호추월(平湖秋月)’과 돌아오는 어선을 말하는 ‘원포귀범(遠浦歸帆)’, 백사장에 내린 기러기 경관인 ‘평사낙안(平沙落雁)’, 어촌에 비낀 석양을 말하는 ‘어촌석조(漁村夕照)’ 등 네 가지 경관이 모두 동정호의 명물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악양루)

동정호는 경치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인문경관도 아주 매력적이다. 호수의 기슭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푸른 녹음 속에서 눈부신 금빛을 뿌리는 고건물 악양루(岳陽樓)가 바로 그 대표이다.

악양성 서북쪽의 언덕에 세워져 뒤에 악양성을 두고 동정호를 내려다 보는 악양루는 강서(江西) 남창(南昌)의 등왕각(藤王閣), 호북(湖北)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와 함께 ‘강남(江南)의 삼대 명루(名樓)’라 불린다.

동정호를 굽어 보고 저 멀리 군산(君山)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무산(巫山)과 연결된 악양루는 예로부터 ‘동정은 이 세상에서 첫째가는 물이고 악양은 이 세상에서 첫째가는 누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악양루)

악양루는 원래 삼국(三國)시기 오(吳)나라 장군 노숙(魯肅)의 열병대(閱兵臺)라고 전해진다. 그 뒤에 적군을 감시하는 초소가 되었다가 당(唐) 나라 때 악양루라 불리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당나라 시인들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맹호연(孟浩然), 한유(韓愈), 유우석(劉禹錫), 백거이(白居易), 이상은(李商隱), 북송(北宋)시기의 문인들인 구양수(歐陽脩), 황정견(黃庭堅), 남송(南宋)시기의 학자들인 장효상(張孝祥), 육유(陸游) 등이 모두 악양루에 올라 경치를 감상했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1044년, 등자경(藤子京)이 악양루를 개축하고 절친이자 유명한 문학가인 범중엄(范仲淹)을 초청해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쓰게 했다. 이 문장에 나오는 ‘먼저 천하의 근심을 걱정하고(先天下之憂以憂) 후에 천하의 즐거움을 누린다(後天下之樂以樂)’는 범중엄의 명언으로 인해 악양루는 더욱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악양루와 동정호와 악양 )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하고 상전이 벽해가 되어도 악양루는 시종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다. 또 ‘네 기둥, 삼 층, 건듯 들린 지붕, 순 원목’의 특징을 지닌 악양루의 건축예술은 완벽하고 훌륭하다.

지붕에는 모두 노란색의 기와를 얹었는데 날아갈 듯 건듯 들린 네 귀퉁이는 용과 봉황으로 장식해 멀리서 악양루를 바라보면 마치 머리를 높이 쳐들고 꼬리를 치켜든 용과 봉황이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듯 하다.

세 층으로 된 지붕 중 3층의 지붕은 고대 장군의 투구와 흡사하다. 이런 모양의 지붕은 중국의 고대 건축물에서 아주 보기 드물다. 또 쇠못을 하나 도 사용하지 않은 악양루는 역학과 미학, 건축학, 공법학 등 분야의 놀라운 성과와 중국 고건물의 독특한 풍격을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군산)

악양루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면 동정호의 은빛 물결에 하얀 돛배가 점점이 수를 놓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리고 푸른 파도 설레는 동정호 수면에 작은 섬 하나가 보일 듯 말 듯한데 그 섬이 바로 군산(君山)이다.

동정호의 물을 사이 두고 악양루와 마주하며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는 군산은 일명 상산(湘山)이나 동정산(洞庭山)이라고도 하는데 크고 작은 72개의 산 봉우리로 구성되어 있다.

당(唐)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하늘과 호수 위아래의 푸른 색이 어우러져(上下天光) 온통 한 가지 푸른빛으로 끝없이 펼쳐진(一碧萬頃)’ 동정호를 하얀 은쟁반에 비유하고 수려한 군산은 그 은쟁반에 담긴 청라(靑螺)에 비유했다.

(사진설명: 군산의 유적지)

군산은 작지만 산에 명승고적이 즐비하고 산에 깃든 신화와 전설은 더욱 많다. 상고시대에 동정호에는 섬이 없어 광풍이 불고 파도가 높을 때면 어디 기댈 곳이 없는 배들이 늘 파도에 휘말렸다고 한다.

이에 동정호에서 살던 72명의 소라 처녀가 인간을 동정해 아픔을 참고 각자 껍데기를 벗어 작은 섬으로 만든 다음 그 섬들을 하나로 모아 군산을 형성했으며 오늘날 군산의 72봉은 바로 72명의 소라 처녀가 변한 것이라는 전설이다.

또 군산의 동정산이라는 명칭에는 이런 전설이 깃들어 있다. ‘수면 위에 떠 있는 이 산의 하단에 백 칸의 금당(金堂)이 있고 그 방에 옥녀(玉女)가 살아 상시로 금석사죽(金石絲竹)을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산정에까지 울린다’는 전설이다.

(사진설명: 동정호와 군산과 악양)

후에 순(舜) 임금의 두 왕비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이 곳에 묻혔고 그 뒤 초(楚) 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구가(九歌)>에서 그녀들을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이라 부르면서 군산 혹은 상산이라 개칭했다는 전설이다. 이런 아름다운 전설은 아름다운 군산에 더 깊은 함의를 부여한다.

고대 초(楚)문화와 백월(百越)문화가 만난 악양에서는 수려한 경치와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우러지며 풍부한 빛을 뿌린다. 그리고 예로부터 이 땅에서는 어질고 덕망높은 인물들(仁人志士)와 영웅호걸이 많이 나고 그들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도 길이 전해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인이 바로 위대한 애국주의 시인인 굴원이다. 가슴에 품은 이상이 실현되지 못하자 굴원은 죽음으로 사악한 세력에 맞섰는데 그 때 악양의 멱라강(汨羅江)을 생명의 종점으로 선택했으며 그로부터 ‘밤낮으로 소리 치며 동정호에 흘러 드는(日夜江聲下洞庭)’ 멱라강은 비장한 영웅의 기개를 싣고 흘렀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굴자사)

애국시인 굴원을 기리기 위해 오늘날 멱라시(汨羅市)에는 굴자사(屈子祠)가 세워져 있으며 중국의 4대 전통명절 중 하나인 단오(端午)의 전설도 바로 이 멱라강에서 기원한다.

시성(詩聖)이라 불린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노후에 사천(四川)에서 배를 타고 동정호를 거쳐 이 곳 악주(岳州)에 이르러 아픈 몸을 끌고 ‘굴자사’를 참배했으며 악양루에 올라 그 유명한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썼다.

한자로 단 40글자 뿐인 이 시에서 두보는 동정호와 악양루의 웅장함도 보여주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우국우민의 심경도 드러내며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사진설명: 소교의 무덤)

이 밖에도 악양에는 삼국(三國) 시기 오(吳)나라 장군인 노숙(魯肅)의 무덤과 동한(東漢)의 때의 유명한 장군인 주유(周瑜)의 아내이자 당대 미녀였던 소교(小喬)의 무덤도 있다.

노숙묘는 악양루에서 동쪽으로 500m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봉분이 봉긋하고 무덤 앞에는 ‘오노공숙묘(吳魯公肅墓)’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노숙은 적벽(赤壁) 전투에서 손권(孫權)과 유비(劉備)가 동맹을 결성하게 하고 주유에게 계책을 내서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했다.

사후 이 곳에 묻힌 소교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과 북송(北宋) 문인 소동파(蘇東坡)의 작품에서 수차 언급된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주유와 소교의 사랑 이야기는 미담으로 길이 전해지고 명(明)나라 때부터 소교묘를 찾아 글을 남기는 문인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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