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8 09:13:07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56] 천수: 복희와 여와의 고향

(사진설명: 아름다운 천수)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쉰 여섯 번째는 복희(伏羲)와 여와(女娲)의 고향 천수(天水)이다. 중국의 서북지역을 언급하면 사람들은 황량한 민둥산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 그리고 세계적인 명소인 막고굴(莫高窟)을 머리에 떠올리지만 천수는 서북지역에 대한 사람들의 이런 인상을 확 바꾸어 버린다.

왜냐하면 이 곳에는 강남과 비슷한 습윤한 기후, 강남에 비견하는 청산녹수의 경치가 있으며 강남처럼 보슬비가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천수를 ‘감숙(甘肅)의 작은 강남’이라 부른다.

천수는 감숙성 동남부, 육반산(六盤山) 산중, 롱중(隴中) 황토고원과 진령(秦嶺) 산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위하(渭河) 강이 동서로 도시를 경유하는 천수는 산 좋고 물이 맑은 뿐더러 물산도 아주 풍부하다.

(사진설명: 천수고성의 일각)

과거에 성기(成紀)라 불린 천수는 기원전의 하(夏)나라 때 옹주(雍州)에 속했으며 기원전 200년대의 진(秦)나라 때에는 상곽(上郭)이라 불리며 롱서군(隴西郡)에 속했다.

기원전 114년 성 북쪽의 호수에서 백룡이 하늘로 날아 올랐다는 전설에 따라 지명을 천수(天水)로 개명했다. 한(漢)나라 때 천수는 실크로드 연안의 중요한 도시였다.

서한(西漢) 후반에 왕망(王莽)이 한 왕조를 대체하면서 왕망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킨 외효(隗嚣)의 세력이 천수와 무도(武都), 롱서(隴西), 란주(蘭州) 일대까지 확대되면서 외효는 ‘삭녕왕(朔寧王)’으로 자처하고 도읍을 천수에 두었다.

(사진설명: 천수의 황궁 옛터)

외오는 천수에서 스스로 왕이 된 후 성 북쪽의 산 위에 화려한 황궁을 축조했는데 그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 후 동한(東漢) 때 이 곳은 남안군(南安郡)에 속했고 삼국(三國)시기에는 태주(泰州)에 속해 촉(蜀)나라와 위(魏)나라가 오랫동안 다툰 요충지가 되었다.

촉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과 위나라 사마의(司馬懿)가 이 일대에서 수차 전투를 벌여 촉의 장군 마속(馬謖)이 군사 요충지인 가정(街亭)을 잃은 이야기, 제갈량이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 이야기 등이 모두 이 곳에서 발생했다.

천수는 중국문명의 중요한 발상지 중 하나이다. 일찍 상고시대의 인문시조들인 복희(伏羲)씨와 여와(女娲)씨가 천수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천수는 ‘복희와 여와의 고향’이라 불린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괘대산)

천수에는 명(明)나라 때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고건물의 군락인 복희묘(伏羲廟), 그리고 복희씨가 팔괘를 창제한 장소의 유적 괘대산(卦臺山)이 있다.

고대 중국 전설 속의 세 황제 중 으뜸인 복희씨는 혼인풍속을 정하고 관리제도를 제정하고 절기를 정하고 악기를 제조하며 사람들에게 고기 잡는 방법과 동물을 사육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중국의 문명발전에 다방면으로 기여했다.

전한데 의하면 괘대산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던 복희씨는 맞은 켠 산 위의 용마동(龍馬洞)에서 짙은 운무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강심의 큰 바위가 강물의 흐름을 막아 위하(渭河) 강에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복희묘)

그 순간 복희씨는 영감을 얻어 즉시 자연계의 하늘과 물, 산, 우레, 바람, 불, 땅, 연못 등 자연계를 대표하는 건(乾)과 감(坎), 간(艮), 진(震), 손(巽), 이(離), 곤(坤), 태(兌) 등 팔괘와 음양이 겹치는 태극도를 그렸다. 그로부터 그 산은 복희씨가 이 곳에서 팔괘를 창제했다는 의미로 괘대산으로 불렸고 조상을 참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태호궁(太昊宮)이라고도 하는 복희묘는 명나라 때인 1490년에 신축했으며 그 후 수차 증축 및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부지 1만 ㎡를 넘는 대 규모 고건물의 군락이 되었다.

두 겹으로 된 마당과 세 개의 문을 거느린 복희묘에는 패방과 본전, 월대(月臺) 등 건물이 있으며 태극전(太極殿)에는 진흙으로 빚은 채색의 복희 소조상이 공양되어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맥적산)

해마다 음력으로 정월 열 엿새는 복희씨의 생일이라고 전해진다. 따라서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천수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복희묘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새 해의 행복과 평안을 기원한다.

실크로드 연안의 중요한 도시인 천수에는 또 이와 관련한 풍부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인 맥적산(麥積山) 석굴이다.

천수에서 동남쪽으로 45km 거리에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모양이 마차 보릿짚을 쌓아 둔 더미 같다고 해서 맥적산이라 부른다. 이 산의 깎아 지른 바위에 조성된 석굴이 바로 맥적산 석굴이다.

(사진설명: 맥적산 석굴의 일각)

맥적산 석굴은 후진(後秦) 때인 384년에서 417년 사이에 축조를 시작해 북위(北魏) 때에 크게 흥성했으며 그 뒤 북주(北周)시대의 보수를 거쳐 수(隨)와 당(唐), 오대(五代), 송(宋), 명(明), 청(淸) 등 시대별로 끊임 없이 축조해 오늘날의 규모를 형성한다.

현재 194개 동굴에 4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사이의 약 7,800여 기에 달하는 조각상과 7,000여 점의 문화재, 1,000여 ㎡에 달하는 벽화가 보존된 맥적산 석굴은 ‘동양의 조각관’이라 불린다.

또 역대의 문인들이 맥적산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석굴을 유람하고 흔적을 남겨 석굴에는 많은 비석도 보존되어 있다. 이는 맥적산에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더욱 가미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천수)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시인 유신(庾信)의 <태주천수군백적아불감명(泰州天水郡麥積崖佛龕銘)>과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산사(山寺)>, 오대(五代) 시인 왕인유(王仁裕)의 시 <천당제시(天堂題詩)>, 송(宋)나라 이사중(李師中)의 시 <맥적산사(麥積山寺)>이다.

많은 명승고적을 거느린 천수에서는 동한(東漢) 시기의 유명한 사부가(詞賦家)인 조일(趙壹)과 동진(東晉)시기의 소설가 왕가(王嘉), 오대(五代) 시기의 시인 왕인유를 비롯해 많은 인물들이 났다.

또 천수인들이 오늘날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 가지는 천수가 당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李白)의 원적지이기도 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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