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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 말 정치가이며 군사가이며 문학가인 조조
2010-06-28 16:43:10 cri

조조의 자는 맹덕(孟德)이고 패국(沛國), 오늘의 안휘성 호현(毫縣) 출신이다. 조조의 원래 성은 하후(夏侯)인데 그의 부친 조숭이 어려서 대환관인 조등의 양자가 되여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글에 능했고 무예가 출중했다. 조조는 독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특히 병법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손자병법"은 그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은 책 중의 하나였다.

조조는 황건(黃巾)봉기 평정에서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한헌제 영한 원년에 조조는 헌제(獻帝) 유협(流協)을 옹립하고 태후와 소제(少帝)를 죽인 후 스스로 상공(相公)으로 자처하면서 조정을 좌우지 했다. 조조는 헌제의 이름을 빌어 북방의 할거 세력들을 평정해 나가면서 중국 북부지역을 점차적으로 통일해 나갔다. 208년 승상(丞相)이 된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여 손권과 유비 징벌에 나섰는데 손권과 유비 연합군에 의해 적벽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213년 조조는 위공(魏公)으로 자처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216년 조조는 위왕(魏王)의 자리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을 마감했다.

용병술에 능한 조조

조조의 모사인 순욱(筍彧)은 조조의 장점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조조의 첫 번째 장점은 합리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용병술이다. 그는 사람을 중용할 때 무엇보다 능력을 중시했으며 일단 기용했으면 철저하게 신뢰했다. 그는 등용된 인재의 과거를 묻지 않았으며 학력이나 인품이 뒤떨어진 사람도 재능만 있으면 기를 펼 수 있게 했다. 조조는 적과 내통한 부하를 용서할 정도로 관대했으며 세인들의 험담이나 비방에 현혹되지 않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조조의 최대 업적의 하나인 오환 정벌 때의 일이다. 많은 신하들이 오환 정벌의 무모함을 말렸으나 그는 원정에 나섰다. 천신만고 끝에 승리를 거둔 조조는 성으로 돌아와 정벌을 말렸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신하들이 겁에 질려 그 이유를 묻자 조조가 이렇게 말했다.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코 올바른 결정이 아니었소. 만류하는 신하들이 있었기에 더욱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해서 승리를 할 수 있었소.그들에게 상을 내리려고 하오."

이 같은 용병술이 조조가 삼국시대 손권과 유비보다 휘하에 많은 인재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이다.

두 번째 장점은 결단력과 임기응변 능력이다. 그는 수많은 전쟁터에서 확신이 서면 지체 없는 공격을 감행해 승리를 거두었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처하는 임기응변도 뛰어났다.

세 번째 장점은 엄격한 법집행과 공정한 상벌시행이다. 그는 법 집행에 예외를 두지 않았으며 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엄격히 구별해 처리했다.

네 번째 장점은 솔선수범과 검소한 생활이다. 평생을 말안장 위에서 생활한 조조는 전투에 늘 솔선수범했으며 절약과 검소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둔전제를 처음 시행한 조조

조조는 중국 역사상 둔전제라는 제도를 처음 시행한 인물로 이름이 높다. 후한 말기에는 오랜 전란으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이 유랑의 길에 올라 농업이 피폐해졌다. 조조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일정 규모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농기구, 씨앗, 식량 등을 국가가 빌려주어 농민들로 하여금 안정적으로 농사일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둔전관을 파견하여 농사를 지도, 감시하고 수확한 농작물의 50% 이상을 국가에 바치도록 했다.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의 특징은 이른바 군농일치에 있다. 즉 황폐해진 농토를 군인들로 하여금 개발, 경작하게 하여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면서 유사시에서는 전장에 나가 싸우게 했던 것이다. 조조가 시행한 둔전제로 농민이 곧 군인이자 군인이 곧 농민이 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둔전제는 호족들이 대규모의 토지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했다.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군비를 조달하면서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에 삼국 가운데 가장 강한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문학가로서의 조조

조조는 그 당시 수준 높은 문학가였다. 그는 특히 악부시라 불리는 시문학 장르에서 뛰어났고 한 구절이 다섯 글자로 되어 있는 오언시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조조가 활동한 시기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연호를 딴 건안 시대(196-220)이다. 기제에 따르면 조조는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 창작에 재능이 뛰어나 건안문학(建安文學)을 크게 일으켰다고 평가되었다. 건안 문학의 특징은 문장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며 전란의 비참함을 노래하거나 사람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때로는 흥겨운 감정을 담기도 한다.

만능 재주꾼인 조조

정사 삼국지의 주석 부분에 따르면 조조는 "낮에는 군사전략을 궁리하고 밤에는 유교 경서를 읽으며 사색에 잠겼다"고 한다. 또한 조조는 "높은 곳에 오르면 반드시 시를 읊조리고 새로운 시가 나오면 음악에 맞추어 노래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서 조조가 대단한 지식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조조는 궁전 건물을 짓거나 기계 설비를 만들 때 직접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고 서예와 장기에도 능했다고 한다. 정사 삼국지의 위서 무제기편을 보면, 조조가 손자병법 관련 문헌을 널리 수집하고 그 내용을 정리해 13편으로 엮은 것은 물론, 그것을 해설하는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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