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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2대 황제 수양제
2010-08-23 14:25:35 cri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光)은 일명 영(英)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 2대 황제이다. 수양제는 수문제(文帝)의 둘째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총명해 10살에 "관고금서전(觀古今書專)"을 줄줄 내리 외울수 있었다. 12살에 진왕(晉王)으로 책봉받고 북변의 방비를 맡았으며586년 진(陳)을 토벌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켰다.

수양제는 부모앞에서 효도하는 가상을 보이면서 자주 부모에게 진언을 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는 형인 양용(楊勇)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부모에게 형을 무함했다. 황후는 수양제의 말을 곧이듣고 수문제더러 양용을 태자에서 폐적시키고 대신 수양제를 황태자로 봉하게 했다. 604년 수문제의 병이 위중해지자 수양제는 제멋대로 날치였다. 수양제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 수문제는 대신들을 곁에 불러 수양제를 황태자에서 폐적시키고 그의 형인 양용을 다시 황태자로 봉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양제는 황제 성지를 위조해 수문제가 불러들인 대신을 잡아들이고 군사를 이끌고 궁전에 쳐들어가 수문제를 죽인 후 왕위에 올랐다.

황제로 된 수양제는 전국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고 강남지구의 물자를 보다 순조롭게 북방으로 날라 오기 위하여 그리고 개인이 향락을 부릴 욕심으로 두 가지 일을 벌였는데 한 가지 일은 낙양에 동도(東都)라 부르는 새 수도를 건설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일은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를 판 것이다. 수양제는 605년에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河)를 개통했다. 이 운하들은 원래 춘추 시대로부터 한대를 거쳐 반 자연, 반 인공적으로 된 수로였는데 수양제가 즉위한 후 운하를 보수 확장했다.

6년 내에 길이가 4800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운하가 개통되었다. 대운하를 개통하는 기간 부역에 동원된 인원수는 수백만에 달했다.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의 경제 지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수도 대흥(大興)에 연결시켜 남북을 일관하는 대동맥을 완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대운하는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공사의 하나로서 중국의 경제, 문화 발전과 통일 위업에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대운하의 개통은 세계적으로 보기드믄 장거였지만 이 부역에 동원된 노동인민들은 극심한 생활난을 겪어야 했다. 번중한 부역은 사회모순의 격화를 초래했다.

612년 수양제는 대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군사 113만 명을 일으켜 고려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다. 이 정벌에 동원된 인부만 해도 300여만 명에 달했지만 후에 량초가 공급이 되지않아 평양성 부근까지 쳐들어간 수나라 군대는 부득이 퇴각하게 되였다. 퇴각하는 수나라군대에 대해 고려군대는 추격 작전을 벌였는데 결과 제일선에 있던 30만 명에 달하는 수나라 군대는 거이 전멸되었고 군사를 통솔하던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도 전사했다. 고려에 대한 첫 정벌은 수나라 군대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613년 수양제는 재차 고려에 대한 두 번째 정벌을 시작했다. 그해 4월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동도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외정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은 국내의 모순을 격화시켜 마침내 양현감의 반란을 초래했다. 양현감의 반란으로 천하는 혼란에 빠졌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양제는 급히 철군 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고려에 대한 두 번째 정벌도 실패로 끝났다.

614년 2월 수양제는 고려에 대한 세 번째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천하가 혼란해져 군대를 동원하기 힘들었고 동원된 군사들 중 도주자들이 많았다. 고려에 대한 세 번째 정벌도 숱한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고려에 대한 세 차례 정벌로 하여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기에 땅을 다루는 사람이 없어 땅은 황폐해 졌고 국력은 크게 내려갔다.

611년 산동, 하남에서 큰물이 졌는데 그 뒤를 이어 질병이 돌아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611년 왕박(王薄)이 지금의 산동성 장구경내에서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봉기는 파죽지세로 전국에 확산되어 갔다. 616년 전국적으로 세 갈래의 봉기 주력군이 형성되었는데 봉기군 앞에서 수나라군대는 패배를 거듭했다.

수나라가 곧 멸망할 것을 내다본 귀족, 관료, 군벌들은 자기 안속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락서산의 궁지에 몰린 수양제는 날마다 향락에 빠져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어 도무지 잠들 수 없었다. 618년 3월 대장 우문화급 (宇文化及)이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사로잡은 후 부하들을 시켜 흰 수건으로 수양제를 목을 졸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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