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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젓가락박물관  
2010-10-19 16:31:56 cri

3.추천코스:개인 젓가락박물관

중국하면은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중화요리가 아마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중화요리하면은 또 젓가락이 연상될텐데, 중국인들이 젓가락을 사용한 역사는 이미 천년이 넘는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 중국인이 있다면 꼭 젓가락을 찾아볼 수 있다. 이토록 젓가락은 이미 중국문화 대표 물의 하나로 부상했다.

상해 다륜로 문화명인가에 중국 특유의 젓가락문화를 보급하고 있는 개인 젓가락박물관이 있다.  

(음악올렸다가 내리우면서…)

박물관이라 하지만 가게가 그리 크지 않아 무심코 지나다보면 놓치기가 일쑤다. 하지만 이곳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전문적으로 젓가락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올해 80세인 가게 주인 남상(藍翔)씨는 70년대부터 젓가락을 소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게에는 당나라 시기 젓가락으로부터 조선과 일본, 태국산 젓가락으로, 총 2천여쌍 젓가락을 소장하고 있는데 대체로 대나무, 나무, 금속, 옥석, 악골 등 5가지 재질로 나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남상씨는 명실상부한 "중국의 젓가락 소장 제1인"이 됐다.

주지하다싶이 젓가락은 중국인이 발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느 시기에 발명됐을까? 남상씨는 젓가락에 대한 문자기록이 상왕조 시기에 최초로 나타났다고 소개했다.

(음향-1)

"<사기>에 '주위상저, 이기자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상왕조의 주왕이 중국의 첫 상아 젓가락을 발명했다는 것이죠. 주왕은 상왕조 말기의 군주니까 3100년전 중국에는 이미 상아 젓가락이 있었다는 얘기가 되죠."

이는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젓가락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젓가락의 원형은 일찍 4,5천년전에 나타났다. 그때 중국인들의 선조는 도자기 가마로 요리를 만들었는데 물이 끓을 때면 아주 뜨거웠다. 맨 손으로 음식물을 건져내면 쉽게 화상을 입기 때문에 총명한 선조들은 나무가지를 꺾어 요리를 건져냈다. 처음에는 나무가지 하나를 이용하다가 여전히 불편함을 느껴 두개를 시도해봤는데 그것이 차츰 굵기가 고르고 길이가 같은 젓가락으로 된 것이었다.

남상씨는 군인이었다. 그의 첫 젓가락 소장품은 항미원조전쟁에서 조선의 한 아주머니가 선물로 준 것이다. 그때는 소장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가 젓가락을 소장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까?

미국 닉슨 전 대통령의 중국방문기간 벌어진 외교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남상씨는 말했다.

(음향-2)

"닉슨 대통령이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연회를 마치면서 젓가락을 내려놓기 바쁘게 카나다 토론토의 한 기자가 얼른 그 젓가락을 챙겨서 자기 양복 안주머니에 넣은 것입니다. 후에 이 기자가 미국에 가게 됐는데 십여명 소장가들이 그 젓가락을 사겠다며 이 기자를 둘러싼거예요. 하지만 이 기자는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의가 있는 것이 바로 이 인민대회당의 젓가락이라며 2천불을 준다고 하더라도 팔지 않겠다고 잡아뗀 것입니다."

1978년 남상씨는 신문에서 이 기사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남상씨는 바로 그때 젓가락이 단지 밥을 먹는데 사용되는 도구일 뿐 아니라 깊은 문화가치와 국제적인 의의가 있음을 깨닫고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남상씨는 젓가락 소장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소장한 젓가락은 각양각색이었다. 연대가 다르고 재질이 상이하다. 금, 은, 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하면 상아, 취옥, 대나무, 산호, 수골,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이외 남상씨는 또 수백가지에 달하는 젓가락꽂이, 젓가락통, 젓가락받침을 소장하고 있다.

소장관에서 남상씨는 특별한 소장품을 선보였다. 경태람 재질로 된 길고 가는 대통 모양의 외관이었는데, 외벽에는 만족과 몽골족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윗부분에는 덮개가 있고 밑부분에는 옥으로 된 장식물이 달려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은질로 된 젓가락 한쌍과 비수 하나가 들어있었다. 두 젓가락은 가느다란 은줄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은줄을 당기니 또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속이 빈 젓가락 속에 감춰진 이쑤시개가 그 은줄에 달려 나왔던 것이다.

(음향-3)

"청나라 시기 때 이런 젓가락을 사용했습니다. 만족과 몽골족은 원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칼을 이용했었죠. 유목민 민족이니깐요. 만족이 베이징을 들이쳐 청나라를 통치하게 됐는데 칼로 식사를 한다는 건 황실의 이미지에 누가 된다고 생각하여 방법을 연구한 것이 칼과 젓가락을 같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칼은 쓰지 않고 선조들을 기리는 기념품으로 두고 식사할 때는 젓가락을 사용했죠."

몽골족 귀족이 사용했다던 식기 세트가 또 있었는데 방금 전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길이 30센치미터에 직경 5밀리미터되는 상어껍질로 싼 원통에 상골로 만든 젓가락 두쌍과 포크 두개, 숫가락과 구멍 뚫린 국자하나, 칼 한자루, 핀셋 하나, 은질로 된 작은 접시 2개, 작은 술잔 2개가 들어있었다. 원통은 혁띠로 말 등에 맬 수 있었다. 몽골의 큰 초원은 땅이 넓고 인적이 드물어 수백리를 가도 인가를 만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 원통 안에 든 식기 세트만 있으면 연도에서 식사하는 것쯤은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남상씨는 젓가락을 소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도 하고 있다. 젓가락에 관한 저작만 이미 6권을 냈다고 한다. 젓가락을 중국어로는 "콰이즈'라고 하는데, 남상씨의 소개에 의하면 젓가락을 원래는 箸(저)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국어에서는 이 젓가락 '箸'의 발음이 나무굼벵이 '蛀(주)'자와 같아, 서민들, 특히는 어부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콰이즈"라고 불렀다고 한다.

식기 기능외에도 젓가락은 상서로움과 아름다운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남상씨의 말이다.

(음향-4)

"젓가락은 한쌍이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젓가락이라면 반드시 한쌍이잖아요. 한쌍이 아니면 젓가락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불과하죠. 옛날에는 결혼 때면 신부의 혼수품에는 반드시 젓가락이 있었죠. 한쌍이라는 뜻에서 길함을 상징했죠. 그리고 젓가락의 중국어 발음이 "콰이즈"라 '귀동자를 빨리 낳아라'는 말과 비슷하잖아요."

작은 젓가락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상씨의 개인젓가락박물관이 사람을 끄는 이유다. 그래서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수소문해 찾아오고 있다. 이들 중에는 손가정 중국 전 문화부장과 한정 상해시장도 있다. 상해가 2010년 엑스포 주최권을 획득한 후 남상씨는 많은 외국인들이 상해를 찾게 될 엑스포가 중국의 젓가락 문화를 홍보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남상씨는 전문 책을 펴내 엑스포 개최 3년전 남상씨는 베이징외국어출판사에서 외국어로 번역해 출판하도록 했다.

(음향-5)

"중문으로 썼었는데 엑스포 때에는 200만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상해를 찾게 되는데 중문을 알아볼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기차표를 사서 베이징 외국어출판사를 찾아 외국어로 좀 내주기를 바랐죠. 출판만 할 수 있다면 원고료가 없어도 괜찮다고 했죠. 그래서 영어판이 나왔는데 대뜸 매진된거예요. 프랑스 독자들이 외국어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프랑어판을 내줄 것을 제의했죠. 그래서 프랑스어판의 '중국 젓가락예술'을 출판했죠."

남상씨는 "나도 엑스포를 위해 기여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지금 남상씨는 상해젓가락문화추진회의 회장으로, 중국 젊은세대들을 상대로 한 젓가락문화 보급에 진력하고 있다. 또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시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남상씨는 중국에 젓가락 애호가들이 점점 많아져 중화민족 특유의 젓가락 문화를 널리 알리고 이어 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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