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东光
2021-06-29 18:28:20 출처:cri
편집:金东光

풍성학려(風聲鶴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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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풀이: 바람 풍(風 fēng), 소리 성(聲 shēng), 학 학(鶴 hè), 학 울 려(唳 lì).

뜻풀이: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소리도 모두 적병으로 의심하다. ②겁을 집어먹은 사람은 하찮은 일에도 크게 놀란다.

출처: 당(唐) 방현령(房玄齡) 등 『진서•부견재기하(晉書•符堅載記下)』

 

유래: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8년(기원 383년) 전진(前秦)의 선소(宣昭)황제 부견(符堅)이 35만의 대군을 휘솔해 남쪽으로 동진을 공격했으며 한꺼번에 동진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다. 효무제가 대장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에게 8만의 군사를 주어 적을 막게 했다.

안휘(安徽) 낙간(洛澗)부근에서 동진의 군대는 이미 진을 치고 전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현은 당시의 상황을 잘 판단해보고는 용맹한 장군인 류뢰지(劉牢之)에게 정예군사 5천을 주어 밤에 전진군의 군영을 습격하도록 했다. 이 전투에서 부견의 25만 선봉부대는 양성(梁成), 왕현(王顯) 등 10명의 장수와 만여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전진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 놓았다.

이어 진나라 군사들은 수로와 육로로 병진하면서 유리한 지형을 장악했다. 당시 부견은 동생인 부융(符融)과 함께 수양성(壽陽城) 성루에 있었는데 진나라 군사들의 진세가 정연하고 사기가 높은 것을 발견했다. 그가 북쪽의 팔공산(八公山)을 바라보니 초목이 모두 사람으로 보이고 천군만마가 매복해 있는듯 하였다. 부견이 머리를 돌려 부융에게 이렇게 말했다. “산과 들에 적군이 널려 있는데 어찌 진나라의 군사가 적다고 한단 말이냐!” 그런 부견의 얼굴에 실망과 두려움이 짙게 깔렸다.

이미 겁을 먹은 부견이 대담한 진공을 펼치지 못하고 비수(淝水)의 북쪽에 진을 쳤다. 이때 사석과 사현이 사신를 부융에게 보내 전진군이 군사를 좀 뒤로 물려주면 진나라 군이 강을 건너와 서로 결전을 치르자고 했다. 부융은 적군이 강을 건너는 도중에 돌연 습격을 가해 일거에 쓸어 버리려는 생각으로 진나라 군의 요구를 들어주고 퇴병하라고 수하 군사들에게 명했다.

그런데 퇴각령이 내려지니 군졸들은 아군의 선두부대가 패한 줄로  생각해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했으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진세가 흔들렸다. 진나라 군대가 이를 틈타 강을 건너 추격을 하니 동진군은 여지없이 패하고 시체가 들판을 뒤덮었다. 부융이 전사하고 부견은 화살을 맞은 후 패잔병들을 수습해 북쪽으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고 길에서 바람소리가 학울음소리가 들려도 진나라 군이 추격해 오는줄로 알았다. (풍성학려)

비수의 전투에서 전진군은 거의 궤멸되었고 그후 얼마 안되어 나라도 무너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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