权香花
2021-09-28 15:50:38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1년 9월 30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9월의 마지막 <청취자의 벗>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벗>과 함께하는 아나운서 박은옥(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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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은 ‘세계 도보의 날’입니다.

보행이 사람들의 건강과 즐거움에 많은 이점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세계생활체육연맹은 세계 도보의 날을 발기했습니다.

‘세계 도보의 날’은 1992년에 창의, 발기되었습니다. 세계생활체육연맹은 1992년 6월 7일, 리오데쟈네이로에서 소집된 세계 수뇌자 정상회의에서 제1차 세계 도보의 날을 가동했습니다. 이때부터 이 활동은 재빨리 보급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일, 세계 도보의 날에 무려 72개 나라의 성원이 참가했습니다. 세계 도보의 날 활동은 또 세계보건기구의 힘 있는 지지를 받았습니다. 세계생활체육연맹은 세계보건기구와 함께 해마다 건강을 위한 운동 프로젝트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해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이 활동에 참여하면서 세계 도보의 날은 현재 세계적으로 제일 영향력이 있는 운동의 하나로 되었습니다.

[간주 편지]

지난주에는 한국 세종특별자치시의 박현우 청취자가 ‘수신보고서’를 보내왔습니다.

박현우 청취자는 수신 프로그램 내용과 수신 일자, 시간을 자세히 밝히고 우리 방송을 통해 “중국의 정보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고” 더욱이 “중국어 배우기 프로그램도 있어서 정말 유익했다”면서 “좋은 방송 감사”하고 “앞으로도 많이 청취하겠다”고 소감을 적었습니다.

네, 수신 보고서를 보내오고, 청취 소감을 밝혀준 박현우 청취자님 감사합니다.

우리 방송 업무에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올 10월 1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 날입니다.

국경절을 맞으면서 현지에서 오랜 전사들을 위문했다고 길림성 연길시의 박철원 청취자가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연길 로전사의 집>에서는 국경절을 맞으며 조국을 축복하고 로전사들에게 축복을 보내는 문예야회를 조직했다.

9월26일, 연길로인뢰봉반과 연변람천애심협회 자원봉사자들이 <연길 로전사의 집>에 모여 일찍 항미원조 보가위국전쟁에서 위훈을 떨친 로전사 12명을 모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군인들과 뢰봉들은 발언에서 선렬들의 업적을 기리며 오늘의 행복을 구가하며 조국의 번영을 축복하였다.

로전사들이 전선에서 싸우며 부르던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고 로인뢰봉반 “배우”들이 다채로운 절목을 선물하였다.

“소선대원”들이 넥타이춤을 이쁘게 추고 군복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포옹을 받으며 기념사진을 남겼고 “도라지”,  ”꽃사세요”등 무용들은 로전사들의 박수갈채를 자아냈다.

“배우”들이 부르는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와 <붉은해 변강 비추네>는 합창으로 변하며 장내를 들썽하였다.

로전사들 가운데도 멋진 가수가 있었고 북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90고령의 로군인들은 청춘의 기백으로 넘쳐 젊은이들을 놀래웠다.

한편에서는 젊은이들이 물만두 빚기에 땀을 흘리고 또 어떤 젊은이는 군인할아버지의 메달속에 담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로세대 공신들과 새시대 사회자원봉사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벌인 춤판은 <로전사의 집>을 오래도록 환락의 장으로 들끓게 하였다.]

네, 국경절을 하루 앞선 9월 30일은 중국 ‘열사 기념일’입니다.

노전사들에게 축복을 보내 영웅 열사들을 기리고 국경 명절을 뜻있게 맞이했다는 박철원 청취자의 현지 자원봉사자들의 좋은 이야기었습니다.

2. 지명과 연변

이 시간에는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이런 제목으로 지명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장백산 기슭의 마을 지명 이야기입니다.

                  장백산에 날리는 소나무의 마지막 꽃향기

  진짜 한족(중국인) 마을에 잘못 들어선 줄 알았다. 동네어구의 촌민센터에서는 몇몇 한족촌민이 난로를 옹기종기 둘러싸고 불을 쬐이고 있었다. 송화촌松花村을 순 조선족마을이라고 하더니 이게 웬 일이지?…

  촌장 김영철 씨를 만나자 그 사람들의 정체부터 물었다.

  “우리가 특별히 초청한 사람들인데요.” 김영철 씨는 대뜸 흥미가 진진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이지요. 원래는 북쪽의 홍기촌紅旗村에서 일했습니다.”

  홍기촌은 민국(民國, 1912~1949) 초년 인가가 살기 시작했던 마을로 원래는 “2호 부락”이라고 불렸다. 1939년 개척단이 이곳에 주둔했으며 1958년 인민공사화 시절에 “홍기대대紅旗大隊”라고 개명했다. 홍기대대를 홍기촌이라고 고친 것은 1983년의 일이라고 한다.

  홍기촌은 이름처럼 안도현에서 하나의 붉은 깃발로 되고 있었다. 백두산 관광길에 있는 조선족민속촌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

  송화촌 역시 민속촌으로 거듭나기 위해 홍기촌에서 운영요원을 물색했던 것이다.

  정작 마을 현황이 화제에 오르자 김영철 씨는 어딘가 암울한 기색을 보였다. 몇 십 년 전부터 마을에서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 현재로선 호적상으로 72가구만 남아있다고 한다. 4대(隊, 촌민소조) 마을은 아예 인가가 전부 자리를 떴고 그 자리에는 도축장이 들어섰다.

  송화촌이 장백산 기슭에 촌락을 형성한 지 50년도 되나마나한 시점이었다.

  1962년, 송강진松江鎮 북쪽의 덕화德華와 영풍永豐, 동쪽의 문창文昌에 살던 조선족들이 분가하여 송화라는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덕화德華는 “덕으로 백성을 감화한다.”는 의미이며 영풍永豐은 “영원히 풍작을 거둔다.”는 의미, 문창文昌은 “문화수준을 높여 정무 실적을 올린다.”는 의미라고 한다. 세 마을 모두 청나라가 멸망되기 직전인 1909년에 형성된 촌락이다.

  송화촌은 송강진에서 동쪽으로 3.4㎞ 상거, 속칭 팔리툰八里屯이라고 불렸다. 송화는 송강진처럼 이도二道 송화강松花江을 이웃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송화강은 만족 말의 ‘송아리우라松阿里烏拉’에서 전음, 하늘의 강인 ‘천하天河’라는 의미라고 한다.

  옛날 하늘에서 기러기가 늘 떼를 지어 이 고장을 날아 지났던 것 같다. 송강은 시초에 娘娘庫라고 불렸는데, 만족 말로 ‘기러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1909년 송강에 현성이 설치되었다. 1949년 현성이 명월구에 이전되면서 속칭 ‘옛 안도’로 불리기도 했다. 현성은 1969년 송강으로 돌아왔다가 1983년 다시 명월구로 복귀했다.

  송강은 청나라 말과 민국, 괴뢰 만주국, 공화국 등 네 조대를 걸친 현성이다. 약 반세기 동안  안도현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괴뢰 만주국 시기에는 일본군과 경찰이 송강에 거점을 잡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친일 무장력으로 악명을 떨친 신선대(新選隊, 神仙隊)도 송강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신선대의 가족들로 이뤄진 조선인마을이 바로 송강 북쪽에 있었다. 1942년 신선대의 가족 50여 가구가 이곳에 와서 마을을 이루면서 ‘협성툰協成屯’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1년 다시 원래의 이름인 두도구頭道溝로 고쳤다. 두도구는 송강부터 동쪽으로 첫 번째 골짜기 어구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 골짜기 어구에 위치한 두 마을 역시 조선인마을이었다. 골짜기 북쪽의 마을은‘북도北道’마을로 1938년 조선반도에서 집단이민 약 100세대가 와서 이룬 촌락이다. 골짜기 남쪽의 마을은 ‘남도南道’ 마을로 1939년 조선반도에서 집단이민 약 100세대가 와서 이룬 촌락이다.

  협성툰은 몰라도 남도나 북도 마을이라고 하면 대뜸 반도 남쪽이나 북쪽의 조선인 이민 마을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남도와 북도 마을의 조선인 이민은 전부 전라도 한곳에 원적을 두고 있다. 이민 1세는 거개 저쪽 세상의 사람이 되었지만 마을에는 아직도 전라도 습관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사실상 남도는 ‘남이도구툰南二道溝屯’의 준말이요, 북도는 ‘북이도구툰北二道溝屯’의 준말이다.

  “지금은 전라도 사투리가 없지요.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연변 말을 합니다.” 김영철 씨의 집에 소일을 왔던 동네 나그네가 우리의 대화에 이렇게 한마디 끼어들었다.

  마을에 깃들었던 옛 고향의 색깔은 어느덧 눈처럼 하얗게 바래고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 후 조선인마을의 원주민들은 대거 귀국길에 올랐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부터 한국바람이 불면서 조선족마을에는 또 한 번 인구파동이 일어났다.

  “우리 마을에도 노인과 병자만 남았지요.” 역시 나그네들이 이렇게 중언부언했다.

  김영철 씨도 한때 이곳저곳 전전하다가 얼마 전에 비로소 귀향했다고 한다. 그는 송화촌을 민속촌으로 기획한 설계사였다.

  백두산 기슭에는 예전부터 조선인마을이 적지 않았다.

  남쪽 양강진兩江鎮의 익산마을은 1937년 전라북도 익산군의 이민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를 떴다. 1941년 한족 이주민들이 다시 마을을 채우면서 이도백하二道白河 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의미로 강남江南이라고 개명했다. 사람을 따라 마을도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도백하는 두 번째 강줄기로 흰 물결이 사품을 치는 강이라는 의미이다. 양강진은 이도백하와 고동하古洞河 두 강의 합수목에 위치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고동하는 만주족 말로 물살이 센 강이라는 의미이다.

  북쪽 만보진萬寶鎮의 강원촌江原村은 1936년 강원도 이민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강원촌은 1966년 산동에서 변강지원 농가들이 집단이민을 하면서 한족마을로 둔갑했지만 이름만은 여전히 강원촌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강원촌은 근원 원原을 삼수변을 붙인 원源으로 바꿨다. 강원도 마을은 만보진 부근을 흐르는 강에 근원을 둔 것처럼 되어버렸다. 만보진은 예전에 삼을 캐고 금을 파며 아편을 심으면서 온갖 보배가 있는 고장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소사하小沙河 부근의 무주茂朱村촌은 그런대로 예전의 이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1960년대, 붉은 빛이라는 의미의‘홍광紅光’이라고 개명했지만 1981년 지명조사를 할 때 원명을 회복했던 것이다. 또 얼마 전까지 전라북도 무주군 이민의 후대가 몇 가구 남아있었다고 한다. 어느덧 마을은 소사하라는 이름처럼 작은 강으로 줄어들었던 것. 소사하는 ‘작은 모래강’이라는 의미로 이웃한 대사하大沙河에 상대하여 지은 이름이다.

  이러니저러니 백두산 기슭에는 청나라 때부터 민국 시기까지 조선인마을이 수두룩이 나타났던 것이다. 지난 세기 60년대에야 비로소 고고성을 터뜨린 송화촌은 조선족마을의 항렬에서 제일 늦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늦둥이가 오히려 옛 마을의 혈맥을 이으려고 누구보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2010년부터 송화촌은 차근차근 민속촌으로 거듭나는 순서를 밟기 시작했다. 국가의 보조금을 지급받아 초가를 전부 허물고 벽돌로 새집을 지었다. 새 마을은 가가호호 지붕마다 태양에너지 온수기를 얹었고 가로세로 골목길에는 태양에너지 가로등을 장치했다. 수도꼭지를 틀면 더운 물이 콸콸 쏟아졌고 깜깜한 밤에도 호롱불을 켠 듯 길이 밝았다.

  홍기 민속촌에서 초청한 한족 ‘전문가’들은 송화촌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직은 추형을 잡고 있는 형국이지만 벌써 외지에서 일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단다.

  “우리 마을 기존의 생활방식을 전시하고 인삼과 같은 토산물을 팔려고 합니다.” 김영철 씨는 이렇게 앞으로의 타산을 밝혔다.

  기실 송화촌은 연변의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민속촌의 하나일 따름이다. 여러 현과 시에서 마을 공동체를 지키고 마을을 부흥하는 대안으로 저마다 민속촌을 만들고 있는 현 주소이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한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지명과 관련한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일 동쪽에 훈춘이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훈춘’이라는 이 지명은 무슨 의미일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명 ‘훈춘’은 무슨 의미로 지은 이름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번,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갑 16번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말]

MC:

네,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 진행에 박은옥(MC),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벗]과 함께 한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벗]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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