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11 14:42:40 출처:CRI
편집:权香花

[청취자의 벗] 2022년 8월 11일 방송듣기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

8월의 두번 <청취자의 > 시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의 > 함께하는 아나운서 임봉해(M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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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목요일인 8 11일은 양력 올해의 223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해가 마감할 때까지 142 남았습니다.

역사 속의 오늘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적으로 8 11일의 대표적인 사건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입니다.

기원전 480 8 11, 온천관 전역에서 스파르타인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페르샤인들의 아테네 공격은 이로써 종식되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또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합과 페르시아 제국이 격돌한 전쟁을 말합니다.

기원전 491년부터 기원전 449년까지페르시아와 아테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은 역사상 아테네의 급성장을 일궈낸 전쟁이자 고대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대략 기원전 490년부터 기원전 479년까지는 페르시아의 공격과 그리스 연합의 방어가 이루어졌고 기원전 479년부터 기원전 449년까지 그리스의 공격과 페르시아의 수비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어쨌든 전쟁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건재했으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왕중왕에 맞서 자신들의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었다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또한 전쟁을 통해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1872 8 11, 청나라 정부는 처음으로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1902 8 11, 중국 전문 예술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12 8 11, 중국 국민당이 창당되었습니다.

1945 8 11, 팔로군이 일본군에 전면 대반격을 했습니다. 팔로군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입니다.

1996 8 11 삼협 댐의 1 수위 이민 작업이 전면 가동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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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는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신라방, 절세의 명인을 낳은 명당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라방, 절세의 명인을 낳은 명당

솔직히 행선지에 가면서 제일 먼저 눈앞에 떠올린 원숭이였다. 자칫 붉은 원숭이의 2016 병신년丙申年 시작한 답사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행선지에는 대륙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손오공孫悟空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손오공은 신괴神怪 소설 서유기西遊記 나오는 주인공으로, 화과산花果山 돌에서 태어난 원숭이다. 손오공은 신통력을 얻어 천상계에 올라가 횡포를 부리다가 석가여래에게 진압된다. 손오공은 당승唐僧 삼장三藏법사에게 구원된 그의 시종으로 되며 천신만고를 겪으며 인도에 가서 경전을 가져온다.

도시 회안淮安 바로 유명한 손오공을 만든 나라 때의 소설가 오승은(吳承恩, 1501~1582) 고향이다.

중국은 옛날 명산과 대천으로 행정구역을 나누었다. 회하淮河 사독四瀆 강하회제江河淮齊 하나로 당연히 지역을 나누는 표식으로 되었다. 오제五帝 시대 천하를 구주九州 획분, 회하의 북쪽은 서주徐州였고 회하의 남쪽은 양주揚州였다. 회안은 회하의 남안에 위치하였으니 양주의 관할 지역으로 되었다.

서주에서 완행 기차로 회안까지 이르는 데는 2시간 남짓이 걸렸다. 그래도 200 길에 두발로 쌓았을 선민先民들의 노고에 비하면 호사를 누린 셈이다.

1 초의 회안은 뭔가 화를 내듯 찌뿌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흐릿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찔끔찔끔 땅에 떨어뜨리고 있었다.

시가지의 동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오승은 고향집 싸늘한 날씨 때문인지 다소 한산했다. 그러나 세계 3D 방송드라마 오승은과 서유기 촬영 세트장이고 부지면적만 1 5 제곱미터나 되는 인민폐로 40위안이라는 티켓 값이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5 전의 고향집에서 오승은과 더불어 신과 인간, 요귀가 함께 등장하는 서유기 세상에 잠시 취할 있었다.

고향집 나오다가 안내 도우미에게 신라방 유적지가 여기서 얼마를 가야 되는가 하고 물었다.

신라방이 뭐예요? 우리 회안에 그런 있어요?

혹시? 해서 거듭 물었지만 같은 물음이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온라인 지도로 미리 찾았던 지상 표지물을 물었더니 그곳은 여기서 고작 3 상거한다고 말한다.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기 신괴 소설이라면 신라방 누군가 지어낸 허구였던가.

기실 회안이라고 하면 거개 서유기 신라방 아닌 지명 회음淮陰 머리에 떠올린다. 회음은 회안의 원명인데, 나라 한신韓信 회음후淮陰侯 봉하면서 더구나 유명세를 탔다. 한신은 회음의 태생으로 고조高祖 유방劉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제일 공헌을 대장군이다.

회안은 2001년에야 지은 이름이며, 기차도 2005년에야 비로소 통했다.

그럴지라도 회안시는 옛날부터 해내외의 교역으로 이름난 고장이었다. 그때 시절 회하는 회안의 동쪽에서 바다로 흘러들었으며, 이로 하여 회안은 대륙 연해의 중요한 항구도시로 되고 있었다.

나라는 대외 정책에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당나라에서 버젓하게 벼슬을 했다. 바닷길과 육로를 따라 대륙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대륙의 많은 지방에 그들의 거주구인 번방蕃坊 만들었다. 신라방은 그때 대륙 연해에 진출한 신라인들이 한데 집중하여 거주한 번방이었다.

지금의 말을 빈다면 신라방 신라 교민의 집거구 코리아타운이었다.

오승은의 고향집 나서자마자 삼륜차를 불렀다. 삼륜차는 서민들이 단거리의 교통수단으로 즐겨 이용하는 무허가 택시이다. 삼륜차 기사라면 회안의 골목골목을 속속들이 꿰고 있을 같았다. 그런데 기사 역시 신라방 유적지를 어느 별나라에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유적지 부근에 있다고 하는 유명 호텔의 이름을 댔더니 그제야 신나게 차를 달린다. 호텔에 이르러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신라방 유적지를 물었다. 나중에 신라방 유적지의 선색을 알려준 사람은 외지의 농민공이었다. 그는 호텔 서남쪽에 있는 네거리에서 몇몇이 함께 공사현장의 경비를 서고 있었다. 저맘쯤에 엎어진 돌이 기념비 같다는 것이다. 신라방인가 뭔가 하는 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과연 공사현장의 흙무지에 네모나게 일부러 깎은 거석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었다. 궤도전차의 역에 지하연결통로를 만들면서 살풍경이 되고 있었다. 와중에 신라방 유적지라고 음각한 거석을 쉽게 찾을 있었다. 글씨가 있는 쪽의 바위 면이 땅에 머리를 박지 않은 천만다행이었다.

무엇이든지 신라방은 결국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마저 잃고 있었다.

당나라 신라방은 초주楚州 번째로 가라고 하면 서러울 명물이었다. 초주는 회안의 다른 하나의 지명으로, 일찍 나라 설치한 주의 이름이다. 초주 관리기구는 지금의 회안시에 위치한다. 초주의 신라방은 자체적인 관리기구인 구당신라소勾當新羅所 설치되어 있는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신라소에는 관리자인 압어押御 혹은 총관이 있었고 전문직의 통역사가 있었다. 이런 관리나 직원은 모두 신라인 자체로 충당되고 있었다.

초주의 신라인들은 주로 조선업과 항해업에 종사했다. 신라인들이 있던 초주 항구는 해주海州 지금의 연운항連運港, 명주明州 지금의 녕파寧波 그리고 천주泉州, 광주廣州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항구로 되고 있었다. 천주, 광주의 행상客商들은 지어 초주에 와서 선박을 주문하거나 임대했다.

운하와 해운 경제가 발달한 초주에는 천개의 돛이 서로 이어졌고 사시장철 드나드는 배들이 그칠 없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초주를 회하 동남쪽의 으뜸가는 라고 칭했다.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 794~864) 귀국할 초주 신라방에서 한꺼번에 60명의 뱃사람을 차출하기도 했다. 초주의 신라방에서 살고 있는 신라인이 최소 수천 명의 규모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주의 신라방은 대륙 연해의 크고 작은 여러 신라방과 신라촌에 살고 있는 신라인들의 사회중심으로 되고 있었다. 신라인들도 초주를 중심으로 연해 남북의 교주(膠州, 산동 동부 위치), 해주 지역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기실 신라방이 위치하고 있는 북진언北辰堰 초주 교통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진은 곧바로 북극성이니 북진언은 한구邗溝 북쪽 끝머리의 언제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구는 1,500 동안 여러 번이나 물길을 바꿨지만 회하에 흘러드는 말구의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다.

말구는 회하에 흘러드는 운하의 입구로 전략적인 위치가 두드러진다. 회하는 예로부터 대륙에서 바다로 통하는 중요한 통로이었다. 동쪽으로 이웃한 고구려, 신라, 백제는 물론 일본 나라는 많은 경우 회하를 대륙 내왕의 교통로로 삼고 있었다.

당나라 말구 지대는 초주가 대륙 연해 일대의 교통과 정치, 상업무역 중심의 항구도시로 되면서 노란 자위 거듭났다. 말구의 양쪽에는 인가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앉았다. 마을 이름이 바로 천년의 역사가 묻어나는 신라방이었다.

대륙 연해 일대의 신라방, 신라촌은 마치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지고 있었다. 여러 신라 마을의 수집된 정보는 초주의 신라방으로 집결, 다시 여러 신라마을로 전파되고 있었다. 승려 엔닌이 초주에 이르자 미구에 남쪽의 천태天台 양주의 서한이 당도했고 방문자들이 뒤따랐다고 한다. 한반도의 삼국 구법승들도 초주를 경유한 경우가 적지 않았겠지만, 엔닌처럼 이름자를 남긴 승려는 별로 없다. 엔닌은 여타의 승려와는 달리 그의 여행 과정을 문자기록으로 명백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엔닌은 여행기 대당구법순례행기大唐求法巡禮行記에서 그가 시초에 초주의 개원사開元寺 머물렀다가 용흥사龍興寺 자리를 옮기며 모두 신라방에 행장을 풀었다고 기록한다.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나서서 그를 위해 잡다한 일을 교섭, 해결했다.

초주 신라방을 번이나 경유한 엔닌의 뒤에는 그렇게 역사力처럼 신라인들이 서있었던 것이다.

개원사와 용흥사는 말구 옛터에서 남쪽으로 5,6 내려가야 한다. 사찰은 모두 전란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용흥사의 경우 한때는 동방 제일의 사찰이라고 불렸지만, 현재로선 하나만 외롭게 남아있다.

용흥사는 고전명작 서유기에도 등장한다. 명나라 때의 잡기雜記 호해수기湖海搜奇 정덕正德 6(1511) 용흥사에 불이 일어나 사찰이 타버렸으며 선당禪堂 홀로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서유기 16회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관음원의 장로가 당승의 보배 가사에 욕심을 들여 당승이 머물고 있는 선당에 불을 질렀는데, 손오공이 불을 피하는 덮개 당승을 덮었다는 것이다. 사찰은 거의 모두 불에 타버렸으나 선당만이 불바다에 그대로 남는다. 정덕 6년은 오승은의 어린 시절이니 용흥사와 이웃한 동네에서 살던 그가 이야기를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용흥사의 아래에는 정오의 짧은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그러나 신라방과 신라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중국의 국보급 인물인 한신, 오승은처럼 명인이 부근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쪽의 길가에 있는 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 고향집이었다. 건물은 부근의 주은래기념관 더불어 주은래고향 관광풍경구 이루고 있었다.

, 신라방이 있던 회안은 유명한 소설가 오승은 그리고 공화국 주은래 선생의 고향이었습니다.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이런 제목으로 신라방, 절세의 명인을 낳은 명당 말씀드렸습니다.

[퀴즈 한마당 코너]

MC:

[퀴즈 한마당] 코너는 달마다 번씩 새로운 퀴즈 하나씩을 내어드리는데요,

계속하여 이달의 퀴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유명한 사찰 소림사에서 불교음악을 배워 반도에 전한 신라 승려가 있습니다. 승려는 누구일까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유명한 사찰 소림사에서 불교음악을 배워 반도에 전한 신라 승려가 있습니다. 승려는 누구일까요.

퀴즈에 참여하실 분들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지나 이메일 또는 팩스로 답안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청취자의 벗과 연계하는 방법]

MC: 편지는 우편번호 100040, 주소는 베이징시 석경산로 16 중국 중앙방송총국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방송센터 조선어부 앞으로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메일은 KOREAN@CRI.COM.CN으로 보내주시구요, 팩스는 010-6889-2257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마감하는 ]

MC: , 그럼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시간 진행에 임봉해(MC), 편성에 김호림이었습니다.

방송을 청취하면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언제든지 전해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취자의 ] 함께 여러분 감사합니다.

[청취자의 ]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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