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 15:05:53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촌-39] 명월만: 아늑한 꽃동네


(사진설명: 아름다운 명월만촌의 일각)

중국의 고촌(古村) 시리즈 서른 아홉 번째는 아늑한 꽃동네 명월만(明月灣, Mingyuewan)촌이다. 이천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월만은 시적인 이름과 그림같은 경관을 가진 강남 시골의 축소판이다.

뒤에 청산을 업고 태호(太湖)를 마주한 명월만촌은 모양이 둥근 달과 같다고 해서 이름이 명월만이다. 먼 옛날 춘추전국(春秋戰國)시기에 오()나라 왕이 미인 서시(西施)와 이 곳에서 달 구경을 했다고 해서 이름이 명월만이라는 야사도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명월만은 이천여년전의 춘추시기에 벌써 오나라의 포로로된 월()나라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부 오나라 사람들이 모여 동네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과거 명월만 사람들은 일하면서 자신을 먹여 살리는 동시에 오나라 왕과 서시가 이 곳에 와서 달구경을 할때 휴식터와 음식,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명월만의 뒷산에는 지금도 서시가 그 때 세안과 화장을 하던 화미천(畵眉泉)유적이 남아 있다.

그 뒤에 당송(唐宋)때에 이르러 명월만은 바둑판같은 동네의 구도를 형성했고 청()나라때 최고의 번성일로를 달렸다.

1770년에 건설된 돌길 석판가(石板街) 1140m길이에 4560조각의 커다란 화강암을 깔아 만들었다. 바둑길이라고도 하는 이 길은 오늘날 명월만특색의 하나로 부상했다.

돌길의 지하에는 배수구가 가설되어 아무리 큰 비가 내려도 금방 물이 빠지고 노면이 깨끗해져 명만가에서는 비온 뒤에도 꽃을 수놓은 헝겊신을 신는다는 말이 있다.

거리의 양쪽에는 세월의 흔적이 역역한 색바랜 높고 낮은 가옥들이 줄지어 있고 건물의 앞과 뒤에는 꽃이 만발해 물이 청산을 그러안고, 산을 꽃을 품으며, 꽃속에 가옥이 있는경관을 형성한다.

청나라때 이 곳 사람들은 객상으로 번 돈이나 꽃나무를 재배해서 번 돈으로 예화당(禮和堂)과 예경당(禮耕堂), 첨서당(瞻瑞堂), 한삼방(漢三房), 설가청(薛家廳), 등가사당(鄧家祠堂) 등 건물들을 지었다.

이런 저택과 사당건물에는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벽돌조각과 목각, 석각물이 즐비하고 화려한 채색벽화도 적지 않아서 강남 민가의 대표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가장 완정하게 보존된 고건물은 1799년에 지은 유경당(裕耕堂)이다. 건물은 원래 ()씨네 가문 저택인 첨서당의 부분이었는데 1943년에 ()씨가문에 매각되면서 유경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도 등씨가문의 후손이 살고 있는 건물은 각자 단독으로 홀과 건물, 서재 등을 가진 개로 무어져 있고 뜰은 담벽에 문으로 연결된다.

정교한 벽돌조각이 가득한 문루(門樓) 인물과 복숭아, 영지버섯, 상서로운 구름 부귀와 길함을 나타내는 내용으로 단장되어 있다. 무늬의 정교함과 조각의 기법 역시 최고를 자랑한다.

명월만촌 입구 호수기슭에는 숲이 무성해 호수에서는 마을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때문에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어부들이 쉽게 방향을 잃고 집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남송(南宋)때에 명월만촌은 촌입구에 높은 장대를 세우고 위에 붉은 초롱을 걸어 밤이면 불을 밝혀 등대역할을 하게 했다.

(사진설명: 명월만촌의 녹나무)

1200여년의 수령을 가진 녹나무도 명월만촌의 심벌이다. 전하는데 의하면천여년에 달하는 명월만촌의 어제를 지켜온 고목은 ()나라때 시인이 명월만에 친구 만나러 왔다가 심은 것이라고 한다.

줄기의 지름이 2m 달하고 높이는 25m 녹나무는 많은 고난을 거쳤다. 화재에 줄기가 불에 타고 벼락을 맞아 고목이 되었는데 고목에서 새로운 싹이 나면서 다시 생명을 이어온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손자가 할아버지를 업었다 녹나무를 형용한다.

녹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시하듯 마을쪽으로 몸을 기울고 있다. 높은 가지와 무성한 숲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녹나무 그늘은 동네 사람들이 편안히 쉬어가는 장소이다.

녹나무 옆의 부두는 어젯날 마을 사람들이 바같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수없는 부두는 길이가 58m, 너비 5m 달하고 256개의 화강암을 깔아 웅장함을 보여준다.

화강암바위속으로 자라난 그루의 나무도 오늘날은 배를 묶어두거나고기그물을 걸어두는 아름드리 나무로 컸다.

명월교(明月橋) 축조연대가 알려지지 않는다. 노면에 화강암을 깔아 만든 교량은 오늘날도 강을 오가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된다. 전하는데 의하면 오나라 왕과 서시가 바로 다리위에서 달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명월교이다.

속칭 명월사(明月寺)라고도 하는 명월선원(明月禪院) 겹의 뜰을 가진 건물군락이다. 미륵전(彌勒殿) 관음(觀音), 성황(城隍), 관제(關帝), 맹장(猛將) 신전을 가지고 있다.

시골의 토속적인 신앙과 종교문화가 어우러진 명월사에는 또한 절의 보수를 기록한 비석들이 남아 있다. 수려한 경치속의 절의 건물은 호수와 달구경을 하는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아직도 명월만촌에서 살아가는 백여가구의 촌민 사백여명은 오늘날도 나무를 키우고 차나무를 재배하며 태호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생활을 계속한다.

곳에서 살아가는 등씨와 (), (), 오씨는 대부분 남송때 은퇴한 귀족들의 후손이다. 일년 사시절 녹음속에 안겨 있는 명월만촌에 들어서면 마치 꿈속의 무릉도원에 들어선 하다.

위치: 강소(江蘇, Jiangsu) 소주(蘇州, Suzhou) 오중(吳中, Wuzhong) 서산(西山, Xi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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