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5 08:40:0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촌-82] 웅애소: 마지막 남은 명나라 성

(사진설명: 아름다운 웅애소촌)

중국의 고촌(古村) 시리즈 중 여든 두 번째는 마지막 남은 명나라 성 웅애소(雄崖所, Xiongyasuo)촌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바다를 마주한 웅애소촌은 적갈색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이름이 웅애소이다.

웅애소 옛성은 1402년의 명(明)나라때 축조된, 명나라와 청(淸)나라 두 조대에 걸친 해양군사보루이다. 산동(山東, Shandong)의 몇몇 해상방어초소의 하나였던 웅애소는 1735년에 군사시설로서의 기능을 잃고나서 대부분 건물이 파손을 면치 못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웅애소 옛성의 유적으로는 흙으로 쌓고 외벽에 청색의 벽돌을 붙인 정방형의 성과 수차의 보수를 거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누각을 떠인 성문이다.

성문의 바같쪽에는 황제의 은혜를 받는다는 의미로 봉은(奉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는 길한 운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영훈(迎薰)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성문안쪽의 계단을 따라 성문위의 문루(門樓)에 오를수 있다. 방 세 칸 너비의 문루는 양쪽에 별채를 거느리고 좁으면서도 아무런 장식도 없는 심플한 처마로 웅장함을 나타낸다.

(사진설명: 웅애소촌의 입구)

웅애소성의 서문문루는 무너졌지만 문틀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진위(鎭威)”라는 두 글자를 새긴 문위의 현판도 여전하다. 웅애소의 남문에 서서 저 멀리 바라보면 맞은켠 산 정상위의 옥황묘(玉皇廟)가 한 눈에 보인다.

돌을 쌓아 지은 옥황묘에서 볼거리는 대들보가 없는 무량전(無樑殿)이다. 역시 명나라때 지은 이 건물은 웅애소촌의 안녕을 지키는 초소처럼 옥황산정에 높이 앉아 있다.

산문과 신전으로 구성된 옥황묘는 치밀하게 째인 구도를 자랑한다. 벽돌로 벽을 쌓고 지붕에 기와를 얹은 신전에는 벽돌로 목조건물을 모조해 첩첩한 처마를 만들었다.

신전에는 문만 있고 창문은 없다. 안쪽방에는 불단을 만들고 옥황상을 공양하며 바같방에는 벽화를 그린 벽을 배경으로 많은 제신의 조각상을 공양하고 있다.

둥근 아치형의 산문위에는 “옥황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산문에 서서 내려다 보면 고요한 바다가 지척이고 웅애소성도 발아래 산기슭에 위치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이 옥황묘가 동쪽의 바다를 마주보는데는 이런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고, 바다는 낮고 용왕은 가깝다”는 전설과 연관된다고 한다. 옥황을 공양하는 절이지만 용왕을 무시할수 없어서 용왕이 있는 바다쪽으로 절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웅애소촌의 거리)

웅애소 남문의 왼쪽에는 백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당이 있다. 단층건물이지만 키 높게 지어져 웅장함을 자랑한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1890년 한 독일 선교사가 이 곳에서 전도를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성당은 웅애소의 창고로 사용된다.

웅애소의 서쪽에는 오래된 우물이 서로 호(互)자 모양의 벽으로 특히함을 자랑한다. 돌을 쌓은 우물의 상단벽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물을 깃는 밧줄에 의해 일부는 지워졌다.

지워지지 않은 글자에 의하면 우물벽에는 자금을 내서 우물을 판 사람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이처럼 우물벽에 공덕비(功德碑)와 비슷한 글을 새긴 것은 이 곳에만 있는 특이한 경관이다.

웅애소 성안 열 십(十)자로 기획된 길에서 과거의 규모를 읽고 줄지은 커다란 맷돌은 과거 식량가공의 규모를 보여준다. 그밖에 성밖에는 성황묘(城隍廟)와 관제묘(關帝廟), 보살묘, 옥황묘, 구신묘(九神廟), 선농단(先農壇) 등 건물들이 있다.

해마다 음력으로 3월 초아흐레날 웅애소촌에서는 절간장행사를 가진다. 남문밖 공지에 임시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펼치며 웅애소의 절들을 찾는 신도들도 이날에 가장 많다.

위치: 산동(山東, Shandong)성 청도(靑島, Qingdao)시 즉묵(卽墨, Jimo)시 풍성(豊城, Fengcheng)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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