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0 14:53:0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왕희지 편: 제1회 어쩌다 사윗감에 물색되다

(사진설명: 왕희지의 석상)

서예의 대가 왕희지

그는 많은 명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서예를 배웠으며 그가 서예를 연습하면서 얼마나 많이 붓을 씻었는지 그의 집 못물은 검게 물들었다. 서예에 매료된 그는 끊임 없는 혁신을 통해 행서(行書)라는 새로운 서체를 발명하고 서예의 대가가 되었다.

그가 바로 고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이다. 당태종(唐太宗)으로부터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은 그의 대표작 <난정집서(蘭亭集序)>는 후세에 ‘이 세상 제일의 행서’, ‘흘러가는 구름인 듯, 놀란 용인 듯’하다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왕희지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에 모두 갈 지(之)자가 들어 있다. 도교의 한 파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신앙하는 왕희지는 아들과 손자의 이름에 모두 지(之)자를 넣어 왕씨 가문의 도교 신앙을 나타냈다.

서예의 대가 왕희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어쩌다 사윗감에 물색되다

당(唐) 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오의항(烏衣巷)>에서 이렇게 썼다.

주작교 언저리에 온갖 들꽃 피어나고(朱雀橋邊野草花)

오의항 입구에 석양이 비껴 있네(烏衣巷口夕斜陽)

그 옛날 왕도와 사안의 집에 드나들던 제비들(舊時王謝堂前燕)

이제는 백성의 집에 예사로이 날아드네(飛入尋常百姓家)

당시 동진(東晉)의 유명한 재상들인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이 바로 주작문 안에서 살았다. 왕씨와 사씨의 두 명문가 자제들이 검은 옷을 입고 골목을 오갔다고 해서 골목 이름이 오의항이다. 하지만 오늘날 눈부시게 고귀하던 오의항이 일반 백성들이 사는 예사로운 곳이 되었다. 그럼 세월을 거슬러 동진의 국도 건강(建康)으로 돌아가서 옛날 오의항에서 벌어진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위(太尉)가 된 거기장군(車騎將軍) 치감(郗鑒)이 대사도(大司徒) 왕도의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으려는 마음에서 왕도에게 서신을 보냈다.

“저의 딸이 혼인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왕씨 가문에 고귀하면서도 뛰어난 인재가 많으니 왕씨 가문의 자제분들 중에서 저희 가문의 사윗감을 물색했으면 합니다. 대사도께서 저의 이 요구를 받아주실 수 있으십니까?”

태위의 서신을 본 왕도는 서신을 가져온 문객에서 말했다.

“좋소. 왕씨와 치씨 가문이 혼인관계를 맺는 건 좋은 일이오. 태위께 내일 오후 사람을 보내라 하시오. 내가 미혼의 조카들을 모두 동쪽 곁채에 불러 모을 테니 와서 임의로 고르라 하시오.”

당시 왕희지는 당숙인 왕도의 집에 기거하며 왕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면서 왕도가 왕희지에게 말했다.

“너도 이제 혼사를 정할 나이가 되었다. 태위 치감에게 열여섯 꽃 나이에 얼굴도 예쁘고 총명하기도 한 치선(郗璇)이라는 딸이 있는데 치 태위가 내일 오후 우리 집에 사람을 보내 사윗감을 물색하게 되었다. 내일 점심 후에 동쪽 곁채에 가서 기다리거라. 너의 사촌들도 모두 함께 할 것이다.”

이튿날, 왕희지는 방에서 점심 먹는 것도 까맣게 잊고 채옹(蔡邕)의 <석경(石經)> 탁본을 보며 서예를 연습했다. 물론 치씨 가문의 사윗감 물색 건도 까맣게 잊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서야 왕희지는 어제 숙부가 한 말이 생각나 급히 밥을 먹고 동쪽 곁채로 갔다. 다행히 사촌형제들은 다 모였지만 치씨 가문의 사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사촌형제들 모두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듯 깔끔한 옷 차림을 하고 정색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본 왕희지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금방 식사를 끝낸 왕희지는 좀 더운 감이 들어서 옷깃을 젖히고 동쪽의 작은 침상에 앉아 차를 마시며 머리 속으로 여전히 채옹의 삼체(三體) 서예를 생각했다.

치감이 파견한 문객이 사윗감을 물색하기 위해 동쪽 곁채에 이르자 왕도의 조카들은 점잖게 맞이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왕희지만은 보고도 못 본체하고 여전히 가슴을 드러낸 채 방의 동쪽에 놓여진 침상, 즉 동상(東床)에 앉아 차를 마시며 서예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왕희지는 의도적으로 못 본체한 것이 아니라 서예를 생각하느라 치씨 가문의 문객이 곁채에 들어서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치씨 가문의 문객이 돌아가서 태위에게 보고했다.

“왕씨 가문의 자제분들은 모두 기개가 비범하고 도량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눈에는 동상에 기대어 있던 청년이 가장 출중했습니다.”

치 태위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점잖게 차려입고 정색한 표정이었는데 동상의 그 젊은이는 가슴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토록 자유롭고 평온하면서도 대범했습니다. 용모도 영준하고 풍채도 좋아 범상치 않았습니다.”

치감이 기쁘게 물었다.

“내가 고르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동상(東床)이오. 그 동상의 이름이 무엇인지 왕사도께 물어보았소?”

“네. 왕희지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대의 안목이 괜찮소. 이 왕희지는 확실히 범상치 않소. 멋진 복야(仆射) 주백인(周伯仁)을 기억하시오? 바로 역적 왕돈(王敦)에게 살해되고 왕 사도가 ‘내가 백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백인은 나로 인해 죽었다’고 슬퍼하던 그 백인 말이오. 백인은 사람을 잘 알아 보기로 유명한데 어느 잔치에서 13살 나는 왕희지를 보고 아주 놀라며 그를 다르게 보았소. 잔치에 가장 고급스러운 소 허파 구이가 오르자 백인은 몸소 한 조각을 베어서 첫 사람으로 왕희지에게 주었소. 이로 인해 왕희지는 명성이 뜨르르 해져서 건강 땅의 유지와 명사들 중에 왕희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럼 제가 제대로 물색한 건가요?”

“그대는 큰 공을 세웠소! 후한 상을 내리리다!”

왕희지는 이렇게 태위 치감의 동상쾌서(東床快婿), 사위가 되었다.

오의항에서 발생한 이 일은 건강의 미담으로 길이 전해졌고 그로부터 천여 년이 흐르도록 중국인들은 사위를 동상쾌서라고도 부른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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