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08:59:2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2] 서안: 옛 장안

(사진설명: 모던과 전통이 어우러진 서안)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두 번째는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운치가 다분한 옛적의 장안, 오늘날의 서안(西安)이다. 13개 왕조의 도읍으로 천여 년의 기나긴 세월 속에서 세상의 변화와 역대 제왕들의 교체를 지켜본 서안은 살아 있는 사서처럼 풍부하고 아름다운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그림을 펼친다.

서안을 가까이 하면 대당성세(大唐盛世)의 편종(編鍾)소리와 실크로드의 낙타 방울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 하고 어제의 생활상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옛 성벽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켜온다.

오늘날 섬서(陝西)성의 성도인 서안은 옛적에 장안(長安)이라 불렀다. 황하(黃河) 강의 중류, 진령(秦嶺) 산발의 북쪽, 팔백리 진천(秦川) 벌이라 부르는 관중(關中) 벌판의 중부에 위치한 서안은 중국 서북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서안)

북쪽으로 위하(渭河) 강을 뒤에 하고 남쪽으로 종남산(終南山)과 이웃한 장안 옛 성의 주변에는 물길이 얼기설기해 예로부터 ‘여덟 갈래의 물길이 장안을 안고 돈다’는 말이 있다.

중국 7대 고도(古都) 중 하나인 장안은 노예제도의 왕조인 서주(西周)에서 봉건사회가 정상을 달리던 당(唐) 왕조에 이르기까지 2천여년 동안 서주와 진(秦), 서한(西漢), 동한(東漢), 신망(新莽), 서진(西晉), 전조(前趙), 전진(前秦), 후진(後秦),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隨), 당을 비롯한 13개 왕조의 도읍이었다.

또 후당(後唐)은 장안을 배도(陪都)로 정했고 많은 중요한 역사 사건들이 이 곳에서 발생했다. 한(漢)나라 후반의 녹림적미(綠林赤眉) 봉기군과 당 나라 후반의 황소(黃巢) 봉기군, 명(明)나라 후반의 봉기군 이자성(李自成)도 이 곳에서 정권을 수립했다.

(사진설명: 미앙궁 유적지)

13개 왕조의 도읍이 되면서 서안은 경제와 문화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바로 장안에서 중국 최초의 기전체(紀傳體) 통사인 <사기(史記)>를 완성했고 서한 때의 민간 악부(樂府) 음악도 이 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장락궁(長樂宮)과 미앙궁(未央宮), 상림원(上林苑)의 축조로 서안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도시였다.

경제 및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서한왕조는 또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빈번한 교류를 진행했다. 두 번이나 서역(西域)을 방문한 장건(張騫)은 멀리 안식국(安息國)과 페르시아에 이르러 도자기와 실크 등 중국의 상품을 전했다.

이와 동시에 여러 나라들의 상인들도 분분히 장안을 오가면서 중앙 아시아와 서아시아의 문화와 물산을 장안에 가지고 왔다. 그로부터 하서(河西) 회랑을 경유하는 무역통로 실크로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사진설명: 거대한 진시황릉)

두터운 역사문화의 침적과 드넓은 문화재 및 유적지를 보유한 서안은 ‘천연(天然) 역사박물관’이라는 미명을 가진다. 장안(長安)현 풍호(豊鎬)궁전 유적지에서 출토된 1만여 점의 갑골과 다량의 청동기는 서주(西周)의 발달한 청동문화를 보여준다. 풍호궁전 유적지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서주시기의 갑골문이 출토된 고성 유적지이기도 하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황제이다. 6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서안에서 거대한 공사를 벌였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제는 13살에 보위에 오른 후 즉시 자신의 능을 축조하기 시작했고 6국을 통일한 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70만명의 인부를 능묘 축조에 동원시켰다. 하지만 진시황제가 붕어할 때까지도 능묘는 완공되지 못했다.

현재 보이는 진시황릉은 규모가 엄청나고 기세가 심히 웅장하다. 황릉의 구도는 진(秦)나라의 도읍이었던 함양(咸陽)을 본떠 두 겹의 성곽을 쌓았으며 남북길이가 동서너비보다 긴, 한자로 돌아올 회(回)자 모양을 펼쳐 보인다. 황릉 중 일부분인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견’이라고 인정되는 유명한 병마용(兵馬俑)이 바로 황릉의 동쪽으로 1,0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사진설명: 진시황 병마용의 일각)

진시황 병마용은 면적이 2 만m²이고 39년 만에 공사를 완공했으며 출토되기 전에 이 지하군단은 2천여년동안 깊이 잠들었다. 1번과 2번, 3번, 4번 갱으로 구성된 병마용의 숫자는 도합 8,000점에 달하고 모두가 진짜 사람과 비슷한 사이즈를 가지며 각자 다양한 모양과 표정을 하고 있어서 살아 있는 듯 생동하다.

일정한 대형으로 열을 지어 방대한 군사 규모를 형성한 이런 병마용들은 6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군사 규모를 재현한다.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이런 규모의 군사는 서안의 상징이자 중국 고대 문명의 대표이기도 하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제는 수십만 명의 인부를 동원해 미앙구(未央區) 삼교진(三橋鎭) 아방촌(阿房村)에 이궁(離宮)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면적 60여만m²의 이궁은 전전(前殿)과 난지궁(蘭池宮), 6국궁실(六國宮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나라 후반에 항우(項羽)가 장안 입성 후 아방궁에 불을 질러 호화로운 궁전이 사라지고 현재는 토담만 남아 아쉬움을 자아낸다.

(사진설명: 서안 고성의 일각)

동한(東漢) 이후 장안은 중앙 아시아, 남아시아 각 국과 내왕하는 교통의 허브였다. 따라서 장안의 경제와 문화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고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 장안은 최고의 번성을 누렸다.

당시 전에 없이 번창한 황성 장안성은 세계적인 도시들인 아테네, 카이로, 로마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 인정되었다. 그 때 장안은 성 안팎에서 대 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고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불교가 성행하고 문화가 전에 없는 번영을 이루었다.

서안에서 오늘날도 볼 수 있는 높이 솟은 대안탑(大雁塔)과 아담한 소안탑(小雁塔), 아늑한 흥교사(興敎寺), 예스러운 종루(鐘樓), 웅장한 대흥선사(大興善寺) 등 축조물은 모두 그 때 신축한 것이다.

(사진설명: 서안의 옛 성벽)

서안의 성벽은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되고 규모가 가장 큰 옛 성벽이다. 당(唐)나라 후반에 전란이 일어나자 장안을 수비하던 한건(韓建)은 방어의 목적으로 외성(外城)과 궁성(宮城)을 포기하고 황성(皇城)을 기본 도시로 삼고 성벽을 축조했다.

그 후 명(明)나라 때인 1370년~1378년에 개축한 서안의 성벽은 네 귀퉁이에 각루(角樓)가 세워져 있고 네 개의 성문이 있으며 중화민국(中華民國) 후에 성문 12개를 새로 냈다.

성벽의 밖에 넓은 해자가 펼쳐진 서안 성벽 구역은 현재 도시를 품에 안은 거대한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성벽에 올라서면 고성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종루와 고루(故樓)가 한 눈에 보인다.

(사진설명: 높이 솟은 종루)

명나라 때인 1384년에 신축한 종루는 푸른 벽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지은, 네 귀퉁이가 건듯 들린 지붕에 푸른 기와를 얹은 목조 건물이다. 이 종루는 서안의 상징이라 할 정도로 유명하다.

1380년에 신축한 고루는 이중으로 된 지붕을 한 장방형의 건물이다. 전한데 의하면 한 때 고루에 커다란 북을 걸어 두고 저녁이면 그 북을 울려 장안성의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당시 고루는 아침이면 종을 울려 시간을 알리던 종루와 함께 ‘신종모고(晨鐘暮鼓)’의 독특한 경관을 형성했다. 1996년 고루와 종루 사이의 건물을 철거하면서 조성한 웅장한 기세의 종루 광장은 현재 서안의 일경이 되었다.

(사진설명: 서안의 비림)

장안고성 남문의 부학항(府學巷)에 들어서면 유명한 비림(碑林)에 이르게 된다.  당나라 때 조각한 비석들인 <십삼경(十三經)>과 <석대고경(石臺考經)>을 보존하기 위해 송(宋) 나라 때에 이 비림을 조성했다.

그 뒤에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에서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2,300여 점의 비석이 이곳에 소장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서예의 대가들이 쓴 작품들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그 중 왕희지(王羲之)의 글을 조각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와 한자, 시리아어 두 가지 문자로 조각한 <대당경교유행중국비(大唐景敎流行中國碑)>, 당나라 때의 <개성석경(開成石經)> 등 유명한 비석들이 높은 사학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높이 솟은 대안탑)

652년, 당나라의 유명한 승려인 삼장법사가 인도로부터 불교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돌아왔다. 삼장법사는 불교경전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대자은사(大慈恩寺)에 대안탑을 축조했다.

대안탑은 초반에 5층으로 된 탑이었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10층으로 증축했고 그 뒤에 다시 7층으로 줄었다. 현재 대안탑은 네모난 원추형의 벽돌탑으로 높이가 약 60m에 달하고 예스러우면서도 단아한 모양과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대안탑은 예로부터 서안을 찾는 사람들이 등반하는 전망대의 명승이었다.

소안탑은 규모가 대안탑에 비해 작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높이 15층에 약 43.3m에 달하는 소안탑은 주변의 아늑한 환경과 어울려 독특한 운치를 자랑한다.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바라보는 대안탑과 소안탑은 고도 당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보존된 장안의 두 심벌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화청지)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간의 러브 스토리는 당 왕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과거 노닐던 화청궁(華淸宮)이 바로 오늘날의 여산(驪山)에 위치해 있었다.

전한데 의하면 과거 울창한 숲의 여산은 푸른 말을 방불케 하다고 해서 여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여산의 북쪽에는 또 일년 사시장철 수온이 43°C를 유지하는 온천 4개가 있었다.

당현종 때에 이르러 여산의 산세와 산자락의 부채 모양의 벌판을 이용해 온천 주변에 화청궁을 축조했다. 화청궁은 구도가 엄밀하고 건물이 호화로우며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온 여산을 감쌌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화산)

유구한 역사로 인해 수도 없이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서안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문화재를 더 잘 보호하기 위해 1983년 서안에 섬서역사박물관을 신축했다. 박물관에는 청동기, 역대 도용(陶俑), 금은기, 무덤 벽화 등 3,000여 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소장한 문화재의 숫자가 중국에서 으뜸을 자랑한다.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서안은 자연경치도 아름답다. 서안의 근처에 서악(西岳)으로 불리는 험준한 화산(華山)과 장수의 대명사인 종남산(終南山), 신비로운 태백산(太白山), 도교문화의 발상지인 누관대(樓觀臺), 선경을 방불케 하는 망천(輞川) 동굴 등 많은 자연 명소가 있다.

그 밖에 서안 주변에는 십여 개의 산림공원이 조성되어 좋은 환경을 자랑한다.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인문, 아름다운 자연이 예스러운 고성과 어울려 과거의 장안성, 오늘날의 서안에 고유의 아름다운 운치를 가미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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