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9:49:3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9] 상구: 상업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상구)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아홉 번째는 상업 도시 상구(商丘)이다. 공중에서 상구고성을 내려다 보면 도시의 중심은 네모나고 그 외곽은 둥글게 조성된 모양이 옛날의 화폐를 방불케 해서 도시 모양 자체가 상품과 상업, 상업문화의 도시임을 말해주는 듯 하다.

하남(河南)의 동쪽, 황하(黃河) 강의 양안, 황회해(黃淮海) 벌판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상구는 하남과 산동(山東), 안휘(安徽) 세 성의 중요한 물자 집산지이다. 상구고성은 북쪽으로 산동성, 남쪽으로 안휘성과 이웃하며 예로부터 ‘하남의 동쪽 관문’이라 불린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오제(五帝)시대에 전욱(顓頊)과 제곡(帝喾)이 이 곳에 도읍을 두었다고 한다. 이 곳의 지세가 낮아서 사람들은 다수가 구릉(丘)이나 언덕(墟)에 집을 지었다고 해서 이름이 상구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상구고성)

기원전 16세기에 하(夏)나라가 멸망하고 세운 상(商)나라가 이 곳에 도읍을 두었고 그로부터 500년 후 천자의 나라 주(周)가 건국되면서 주성왕(周成王)은 상나라 주왕(紂王)의 서출 형인 미자(微子)에게 상구를 하사해 이 곳에 제후의 나라 송(宋)을 세우게 했다. 송나라는 32명의 왕을 거치며 760여년 간 존속했으며 그로 인해 오늘날도 상구에는 송나라 도성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북송(北宋)시기에 이르러 상구는 배도(陪都)로 남경(南京)이라 불리며 동경(東京) 개봉(開封), 서경(西京) 낙양(洛陽), 천경(天京) 대명(大名)과 함께 사경(四京)으로 이름을 나란히 했다. 당시 상구는 교통이 발달되고 상업이 앞서가는 중요한 도시였다.

그 후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 모두 이 곳에 도시를 건설했고 그 중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고성은 명나라 때의 귀덕(歸 德) 고성, 즉 오늘날의 상구고성이다.

(사진설명: 상구고성의 구도)

귀덕부성(歸德府城)은 명나라 때인 1511년에 신축된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상구 현성(縣城)이다. 오늘날 상구고성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성(城)과 해자(池)를 거느린 고성이다.

성벽과 해자, 성곽 세 가지가 하나로 어우러진 상구고성은 바깥쪽이 둥글고 안쪽은 네모나서 거대한 고대의 화폐가 이 땅에 놓여 있는 듯 하다. 도시의 구성에서 중국의 상품, 상업, 상업문화의 발상지임을 말하는 상구고성은 또 ‘팔괘의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수천 년 동안 황하강물의 범람으로 고성 해자의 물밑에는 서주(西周)시기와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의 수양(睢陽)고성, 송(宋)나라 때의 남경성(南京城), 원(元)나라 때의 귀덕성부 등 여러 왕조의 고성이 잠들어 있으며 이로 인해 상구고성은 ‘팔괘의 도시, 수상의 도시, 성 위에 성의 도시’라 불리며 이는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일무이하다.

(사진설명: 고성의 성문과 성벽과 석교)

상구고성의 성벽은 둘레가 3.6km이고 4개의 성루(城樓)를 거느린다. 북쪽의 성루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저 멀리 남쪽 성문이 맞은 켠에 솟아 있고 동쪽의 성문과 서쪽의 성문은 서로 엇갈린 두 갈래의 거리 양쪽에 각각 솟아 있다.

상생과 상극의 오행학설에 의하면 금(金)과 목(木)은 상극이기 때문이다. 금을 말하는 서쪽과 목을 말하는 동쪽의 성문이 정면으로 마주하면 서로 해를 끼치기 때문에 상극을 상생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화위복의 목적으로 두 성문을 서로 다른 거리의 끝에 세운 것이다.

성안의 지세는 거북이 등처럼 가운 데가 높고 사면으로 펼쳐지면서 지세가 점점 낮아진다. 성안의 93갈래 거리는 가로와 세로로 펼쳐져 거리마다 서로 통한다. 그 거리를 거닐면 양쪽으로 날아갈 듯한 지붕을 한 여러 가지 고건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건물들에는 붉은 초롱이 죽 걸려 있어 예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응천서원)

상구고성의 남쪽 성문을 나가면 바로 유명한 응천서원(應天書院)이 보인다. 응천서원은 강서(江西) 여산(廬山)의 백록동(白鹿洞) 서원, 호남(湖南) 장사(長沙)의 악려(岳麗) 서원, 하남(河南) 등봉(登封)의 숭양(嵩陽) 서원과 함께 북송(北宋)의 4대 서원으로 인정된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범중엄(范仲淹)은 젊었을 때 이 응천서원에서 학문을 배워 성공했으며 그 뒤에는 또 상구에 눌러 살았다. 또 후에는 응천부의 지사 안수(晏殊)가 범중엄을 서원에 초청해 학문을 가르치게 했다.

그로부터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학도들이 불원천리하고 응천서원을 찾아 응천서원의 명성은 더욱 자자하게 되었다. 응천서원이 키운 명인과 학도들이 아주 많은데 그 중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은 후방역(侯方域)이다.

(사진설명: 진회하의 야경)

후방역은 명나라 후반, 청나라 초반 진회(秦淮)의 명기 이향군(李香君)과 손에 손 잡고 사랑으로 점철된 비운의 <도화선(桃花扇)>을 쓴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명문세가이자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난 후방역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다. 명나라 후반, 풍전등화의 명나라 운명을 보면서 젊은 나이에 벌써 박학으로 널리 이름을 날린 후방역은 22살 때 남경(南京)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

남경의 진회하(秦淮河) 강기슭에서 후방역은 16살 꽃 나이의 이향군을 만났고 두 사람은 첫 눈에 정이 들어 평생을 언약했다. 그러면서 후방역은 이향군에서 사랑의 징표로 둥근 부채를 선물했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도화선의 이야기)

명나라의 국도 베이징이 청나라에 점령된 후 완대성(阮大鋮)이 남방에 새로 세운 명나라 조정의 권력을 장악했다. 후방역이 그 죄를 적발하자 두려움을 느낀 완대성은 후방역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후방역과 이향군이 결혼하는 기회를 빌어 뇌물을 주려다가 이향군으로부터 거절을 받았다.

앙심을 품은 완대성은 후방역에게 보복을 단행해 후방역은 도처로 도망을 다니며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완대성은 회양(淮陽)의 총독이자 순무인 전앙(田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향군을 그의 첩실로 선물하고자 했다.

이에 단호하게 불복한 이향군은 머리로 탁자를 들이 박아 하얀 부채를 붉게 물들였다. 후방역의 절친이자 유명한 화가인 양룡우(楊龍友)가 사랑에 대한 이향군의 충성에 감동되어 붉은 핏자국을 바탕으로 부채에 복숭아꽃을 그렸다. 이 것이 바로 유명한 도화선(桃花扇)이다.

(사진설명: 후방역의 생가)

이향군은 사람을 시켜 그 도화선을 후방역에게 보내 자신의 굳은 지조를 전했다. 후방역은 남경으로 돌아오자 완대성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후에 감옥을 탈출한 후방역은 서하산(栖霞山) 백운암(白雲庵)에서 이향군을 찾아냈다.

오늘날 상구고성에는 여전히 그 도화선의 주인공 후방역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예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명청 시기 풍격을 띤 사합원(四合院)으로 된 후방역의 생가는 목조 건물이며 메인 건물이 2층으로 되어 있다.

정문 위에 <장회당(壯悔堂)>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액자가 걸려 있는 후방역의 생가는 오늘날도 여전히 어제의 풍모를 자랑한다. 예스러운 건물에서 두 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모두 위대한 학자인 후방역을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게 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상구)

역사적으로 상구에서는 많은 유명한 사건들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상구에는 많은 기념적 의미가 있는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그런 유적지 들 중의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자.

하나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상구에서 뱀을 벤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참사비(斬蛇碑)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의 환향 차례를 기리기 위해 세운 환향사(鄕祠), 그리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중 한 명인 제환공(齊桓公)이 여러 제후들과 동맹을 맺던 규병대(葵兵臺) 유적 등이다.

또 서한(西漢)시기의 유명한 승상(丞相) 소하(蕭何)가 중국 최초의 법률을 제정한 ‘조율대(造律臺)’ 유적지와 전설 속 제곡의 아들 알백(閼伯)을 기리기 위해 축조한 알백대도 상구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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