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9:57:52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 함양: 진 제국의 도읍

(사진설명: 아름다운 함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 번째는 진(秦) 제국의 도읍 함양(咸陽)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함양에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 집권제 봉건제국을 건립한 후 이 곳은 한 때 전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흘러 역사는 유구한 이 땅에 수많은 눈부신 성과와 더없이 소중한 역사 유적지와 보물을 대량으로 남겼다.

위수(渭水)의 북쪽 기슭, 종산(宗山)의 남쪽에 위치한 함양은 섬서(陝西)의 8백리 진천(秦川)벌의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다. 서안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가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도시 함양은 이로 인해 고대 실크로드의 제일 역이기도 하다.

함양에 현(縣)을 둔지는 2300여년이 지났지만 그 중 가장 눈부신 한 때는 진 왕조의 국도가 되었던 시기였다.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사이에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고 함양을 중국 역사상 최초로 된 통일국가의 도읍으로 정했다.

(사진설명: 봉황대 유적지의 일각)

진시황제는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통하는 치도(馳道)를 건설해 함양을 전각이 숲을 이루고 경제가 번창하며 도로가 곳곳으로 통하는 당시 중국 최대의 도시와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제 정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제는 6국을 통일하면서 한 나라의 도읍을 점령할 때마다 함양 북쪽의 산등성이에 자신이 멸한 그 나라의 왕궁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唐)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함양의 궁궐은 겹겹으로 높이 솟았는데(咸陽宮闕郁嵯峨)  6국의 누각은 능라보다도 더 화려하네(六國樓臺艶綺羅)”라는 시로 함양의 웅장한 전각을 묘사했다.

(사진설명: 건릉 유적지 일각)

진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한 후 6개국의 유지와 귀족 12만명을 함양으로 이주시켜 함양의 인구는 전에 없이 급증했다. 거기에 함양에 주둔한 군사까지 합치면 당시 함양은 세계적으로 최초로 백 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대도시였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와 동시에 진시황제의 독재로 인해 함양에서는 일자천금(一字千金)과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일련의 희비극들도 펼쳐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진 왕조가 멸망하자 눈부시고 웅장하던 함양도 티끌로 사라졌다.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가 군사를 거느리고 함양에 쳐들어와 진 왕조의 궁전을 소각해버렸다.

(사진설명: 함양의 문묘)

진 왕조에 이어 설립된 한(漢) 왕조가 서안(西安)에 국도를 정하면서 함양은 과거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한 나라 때 함양은 또 선후로 신성(新城)과 위성(渭城)이라 개명까지 하게 되었다.

한무제(漢武帝)가 실크로드를 개척한 후 함양은 서안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거치는 첫 번째 도시가 되었다. 당시 함양을 벗어나서 위수강을 건너야 기나긴 실크로드의 시작이라고 인정되었다.

함양은 고대 중국의 역대 제왕들의 무덤이 가장 집중된 지역이다. 중국 역사상 주(周)나라와 한 나라, 수(隨)나라, 당(唐)나라 제왕들의 무덤이 모두 함양에 있다.

(사진설명: 함양의 서한 병마용)

그 중 당 나라 때만 해도 27명의 황제가 이 곳에 묻혀 있으며 그 외 순장 무덤은 그 숫자가 더욱 많다. 한장릉(漢長陵)은 한 나라의 개국황제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무덤인데 주변에는 황후인 여후(呂后)의 무덤과 소하(蕭何), 조삼(曹蔘), 장량(張良), 주발(周勃) 등 문무관원, 무장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서한(西漢)의 채색 병마용(兵馬俑)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 규모 병마용이다. 중국 서한 시기 황실 호위대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병마용은 기마병 583명과 보병 1965명, 지휘용 병거 1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삼천의 병마용은 서구와 북미,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서 전시되어 중국의 고대 문명을 널리 선양하고 중외 문화와 역사의 교류를 위해 크게 기여했다.

(사진설명: 함양의 순릉비)

함양에서 동북쪽으로 18km 거리에 위치한 순릉(順陵)은 당 왕조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모친인 양씨(楊氏)의 무덤이다. 670년에 양씨가 유명을 달리한 후 왕례(王禮)로 장사를 치렀다.

690년 측천무후는 황제로 등극한 후 모친 양씨를 효명고황후(孝明高皇后)로 추존하고 그녀의 무덤을 순릉으로 개명했다. 순릉은 안팎으로 두 겹의 성을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 네모난 내성 황성(皇城)의 옛 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부지 110만 m2의 외성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현재 순릉의 앞에는 석인(石人)과 석양(石羊), 석마(石馬), 돌사자 등 30여 점의 석인석수가 남아 있다. 그 중 돌사자가 가장 눈에 띄는데 높이가 4m에 달하고 몸집이 우람지며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갈기를 곤두세우며 입을 크게 벌리고 노호하며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달려가려는 모양이다.

(사진설명: 함양의 무릉)

함양에서 서쪽으로 12km 떨어진 무릉(茂陵)은 한무제의 무덤이다. 한 나라 제왕의 무덤 중 규모가 가장 크고 등급이 가장 높으며 축조시간이 가장 길고 순장품이 가장 풍부한 무릉은 ‘중국의 피라미드’라 불린다.

무릉의 주변에는 이부인(李夫人)과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곽광(霍光) 등 많은 황실성원, 귀족, 공신들의 무덤이 산재해 있다.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곽거병의 무덤은 현재 무릉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8살에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 출정 길에 오른 곽거병은 기마병 백 명을 거느리고 흉노 선우(單于)의 숙조부(叔祖父)를 이겼으며 후에는 서역으로 통하는 통로도 개척했다.

(사진설명: 곽거병의 무덤)

그때 흉노족들은 “우리로 하여금 기련산(祁連山)을 잃게 하고 가축을 기르지 못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지산(支山)에 몸을 두고 우리 여인들 얼굴의 희색을 빼앗아 갔네”라는 노래로 곽거병의 공적을 묘사했다.

기원전 117년, 24살의 곽거병이 병사하자 한무제는 크나큰 슬픔을 찾으며 당시 축조 중에 있던 자신의 무덤인 무릉 옆에 기련산 모양으로 곽거병의 묘실을 만들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무덤 주변에 석인과 석수를 세웠다.

그 밖에 소릉(昭陵)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무덤이다. 산을 파서 축조한 소릉에 유명한 석상인 소릉육준(昭陵六駿)이 전시되어 있으며 현재 이 곳에는 소릉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건릉)

건릉(乾陵)은 당고종(唐高宗)제와 여황제 측천무후의 합장묘이다. 건릉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함께 묻힌 무덤이자 당 나라의 18기 능묘 중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무덤이다. 그 외 양릉(陽陵)은 한경제(漢景帝)와 황후 왕씨(王氏)의 합장묘이다.

함양은 중화문명 발상지의 하나이다. <시경(詩經)>에는 “강원(姜螈)이 후직(后稷)을 낳은 후 이 곳에서 자자손손 살아가며 주(周) 문화를 형성했고 그 뒤의 선민들은 이 곳에서 ‘경위(涇渭) 문화’라 일컫는 상고문명을 형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업의 비조 후직은 이 곳에서 백 가지 곡물을 재배하고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며 농경문화를 전파하고 중국 농업문명을 개척했다. 그 외 문학가 사마상여(司馬相如)와 철학자 동중서(董仲舒), 역사학자 사마천(司馬遷) 등도 모두 함양출신이다.

(사진설명: 함양시 박물관의 일각)

그 중에서도 특히 동중서가 창도한 ‘백가의 철폐(罷黜百家)와 유가의 독존(獨尊儒術)’은 2천여 년 동안 중국의 봉건사회를 지배한 도덕적 윤리적 체계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 송(宋)나라 때의 경제개혁가 범상(范祥)과 청(淸)나라 교육자 유고우(劉古愚), 근대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원로이자 애국인사인 어우임(於右任), 수리 전문가 이의지(李儀祉) 등도 중국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역사유적지를 보존하고 과거를 기리기 위해 명(明)나라 초반에 함양의 문묘(文廟)에 기반해 함양시박물관을 세웠다. 함양 도심에 위치한 함양시박물관은 진 나라와 한 나라 두 왕조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소장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함양시)

그 중 가장 유명한 문화재는 서한 시기의 3천 점 채색 병마용과 당 나라 때의 백도자기로 된 춤추는 말, 그리고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다른 채색의 병마용이다.

2천 년의 세월이 흘러 과거의 진 왕조와 한 왕조는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위하강 기슭에 산재한 역대 제왕들의 무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변함 없이 그 자리를 지킨다.

연연 백 리를 뻗어 있는 이런 제왕의 무덤들은 “위수강변에 사람 그림자 없고 높이 솟은 봉분과 그 옆에 누운 기린만 보이네”라는 기이한 경관을 형성하며 함양 고유의 모습을 형성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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