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심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한 번째는 청(淸) 왕조의 발상지 심양(瀋陽)이다. 심양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1950년대 중국의 발전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유명한 공업도시 심양을 머리에 떠올리지만 사실 이 도시의 시작은 누르하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료(松遼) 벌판의 동쪽, 요녕(遼寧) 성의 중부에 위치한 심양은 요하(遼河) 강의 지천인 혼하(渾河) 강 기슭, 장백산(長白山) 산발의 남쪽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어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자랑한다. 오늘날 요녕성의 성도인 심양은 요녕성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이자 중국의 유명한 중공업 도시이다.
심양은 청 왕조의 발상지이다. 말 잔등위의 민족, 산해관(山海關) 북쪽에서 시작해 산해관을 넘어 남진하여 북경(北京)의 황궁에 입성해 400여년 간 존속한 왕조, 강희제와 건륭제의 성세로 중국 역사에 눈부신 한 획을 그은 황제들 모두가 시작된 곳이 심양이며 심양은 이로 인해 ‘한 개 왕조의 발상지, 두 명 황제의 왕성(王城)’이라 불린다.
(사진설명: 심양의 고궁)
명(明) 나라 때인 1616년 누르하치는 여진(女眞)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고 스스로 칸(汗)이라 칭하며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정했다. 그리고 1621년 누르하치는 요양(遼陽)과 심양을 점령했으며 4년 뒤에 심양으로 천도하고 그 곳에 황궁을 신축했다.
누르하치가 붕어한 후 그의 8남 황태극이 보위를 이어 받아 칸이 되었다. 황태극은 여러 왕과 문무백관의 옹위로 심양의 황궁대정전(皇宮大政殿)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가지고 보위에 올랐으며 심양성 증축을 개시했다.
1636년 황태극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청 왕조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순치(順治)제가 보위에 오를 때까지 19년 동안 심양은 줄곧 청 왕조의 도읍이었다.
(사진설명: 심양 고궁의 일각)
1644년 순치제가 청 나라의 도읍을 북경으로 옮긴 후 심양의 황궁은 사람은 가고 건물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황궁의 존재로 인해 심양은 그 뒤의 수백 년 동안 여전히 패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후에 ‘산해관 밖의 자금성’이라 불리는 심양 고궁(故宮)은 중국의 2대 궁전 건축물의 군락이 되었다.
1625년, 누르하치 시대에 축성을 시작한 심양 고궁은 1636년 황태극의 시대에 완공했으며 건륭(乾隆) 제 때 증축을 거쳤다. 심양 고궁은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와 청태종(淸太宗) 황태극의 황궁이었으며 청세조(淸世祖)도 이 곳에서 보위에 올랐다.
청나라가 북경에 입성한 후 심양 고궁은 봉천행궁(奉天行宮)이라 불리며 역대 황제들이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동쪽을 순시할 때 임시로 머물며 나랏일을 보는 중요한 장소가 되어 일명 성경궁궐(盛京宮闕)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진설명: 심양 고궁의 일각)
황태극은 보위에 오른 후 이 황궁을 축조하기 위해 선후로 30여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고 9천여㎥에 달하는 나무를 벌목했으며 700여 만장에 달하는 기와를 구웠고 각지에서 유능한 장인들을 불러모았다.
현재 심양 고궁은 부지가 6만㎥2에 달하며 뜰 20여개, 건물 300여 채를 거느린다. 고궁은 중로(中路)와 동로(東路), 서로(西路) 등 세 갈래에 의해 여러 지역으로 나뉘고 황궁의 사면에는 키 높은 담벽이 쌓여 베이징(北京)의 고궁 버금으로 가는, 완전하게 보존된 황궁 건축물의 군락이다.
누르하치와 연관되는 심양의 또 다른 문화재는 일명 동릉(東陵)이라고도 하는 복릉(福陵)이다.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11km 거리의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복릉은 누르하치와 그의 황후인 예허나라씨(葉赫那拉氏)의 무덤이다.
(사진설명: 복릉의 일각)
북쪽으로 뒤에 천주산(天柱山)을 두고 남쪽으로 혼하강을 마주한 복릉은 사면에 붉은 담을 쌓았는데 지세가 북쪽으로 가면서 점점 높아져 걸음마다 높은 곳으로 오르는 느낌을 준다.
복릉 남쪽의 정홍문(正紅門) 밖에는 화표(華表)와 돌 사자, 석 패방(牌坊), 하마비(下馬碑) 등이 줄지어 있으며 정홍문에 들어서면 참도(參道)의 양쪽에 돌 사자와 석마, 돌 낙타, 돌 호랑이 석물이 줄지어 있다.
삼도의 끝에는 산세를 따라 108개의 계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비루(碑樓)가 세워져 있고 비루의 뒤에는 능원의 메인인 방성(方城)이 축조되어 있다. 방성의 뒤에 반달 모양의 보성(寶城)이 있고 그 보성의 중앙에 관이 묻혀 있는 지하궁전이 위치해 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소릉)
심양의 또 다른 황제릉은 청 태종제 황태극의 황릉인 소릉(昭陵)이다. 심양의 북쪽에 위치해 북릉(北陵)이라고도 불리는 소릉에는 황태극과 그의 효장문황후(孝庄文皇后)가 묻혀 있다.
1643년에 축조를 시작해서 1651년에 완공한 이 황릉은 부지가 450만㎡에 달한다. 소릉의 구도는 복릉과 대체적으로 비슷하고 다만 장식물과 다른 건물이 더 많을 뿐이다. 소릉은 영릉(永陵), 복릉 등 산해관 밖에 위치한 세 기의 청 왕조 황릉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체계가 가장 완전한 황릉이다.
(사진설명: 장학량의 동상)
심양의 근대사에서 장학량(張學良)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 동북의 군벌로 세상을 호령하고 정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장학량은 민족의 큰 뜻을 중히 여기고 나라의 통일을 위해 뛰어난 기여를 했다.
1929년 장학량은 동북을 다스리며 북양(北洋) 군벌의 할거국면을 끝내고 국민정부의 통일을 실현했다. 장학량의 통일 선언이 국민정부에 대한 가장 큰 기여라면 그가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變)’은 새 중국에 대한 가장 큰 기여라 할 수 있다.
1936년 일본의 침략으로 중화민족이 위험에 처하자 장학량은 양호성(楊虎城) 장군과 함께 내전을 주장하고 항일은 뒷전인 장개석(蔣介石)을 감금했다.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형성에 기반을 닦은 장학량은 중국공산당의 공신이라 할 수 있다.
(사진설명: 장씨수부의 대청루)
심양 고궁의 남쪽에 위치한 장씨수부(張氏帅府)는 대수부(大帅府) 혹은 소수부(少帅府)라고도 불리는 청나라 후반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반 동북의 군벌인 장작림(張作霖)과 그의 아들인 애국 장군 장학량의 저택이다.
저택은 부지가 1만 6천m2에 달하며 동원(東院)과 중원(中院)에 상이한 풍격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면에 청색의 벽돌로 쌓은 3m 높이의 두터운 담벽이 축조되어 있다.
장씨수부의 사합원과 소청루(小靑樓), 대청루(大靑樓) 등 건물들 중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대청루이다. 대청루 1층의 홀은 미팅룸으로 장학량 장군은 이 곳에서 많은 큰 사건들을 결정했다.
(사진설명: 심양의 괴파)
심양에서는 풍부한 역사 인문명소 외에도 두 곳의 기이한 자연경관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이상한 언덕 괴파(怪坡)이다. 길이 80m, 너비 20m의 이 언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나 이상하게 모든 차량이 이 곳에 이르면 페달을 밟지 않아도 스스로 언덕을 오르고 이와 반대로 언덕을 내릴 때는 오히려 페달을 밟아야 한다.
심양의 또 다른 자연경관은 19억 년 전의 고대 운석이다. 19억 년 전 이 곳에는 많은 운석이 떨어졌는데 그 중 대자산(臺子山) 운석은 길이 100m, 너비 50m, 무게 200톤에 달한다.
대자산에는 운석 하나만 있지만 만두산(饅頭山)에서는 300m 길이에 100m 너비의 지역에 17개의 고대 운석이 발견되어 19억 년 전 별똥별이 쏟아지던 황홀한 경관을 연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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