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09:27:0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7] 평요: 완전하게 보존된 고성

(사진설명: 아름다운 평요)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열일곱 번째는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중국의 고성 평요(平遙)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산서(山西)는 상고시대 황제(黃帝)의 전설과 근대 산서 상인들의 레전드, 현대의 석탄산업 등을 망라해 중화문명을 위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 중 산서를 찾는 사람들이 빼놓지 않는 도시가 하나 있으니 바로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고성 평요이다. 270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과거의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평요는 중화민족 ‘문화의 보물’이라 불린다.

산서성 중부, 태원(太原) 분지의 남쪽, 산서성 성도 태원과 90km 거리에 위치한 평요는 분하(汾河) 강을 끼고 동포(同蒲) 철도와 대운(大運) 도로가 경유해 교통이 편리한 요충지이다. 따라서 평요는 예로부터 상인들이 모여 드는 시장으로 ‘미니 북경(北京)’이라 불렸다.

(사진설명: 평요고성 전경)

과거 고도(古陶)라 불린 평요는 요(堯) 임금의 임지였다고 전해진다. 평요는 기원전 827년~기원전 782년 사이의 주선왕(周宣王) 시기부터 건물을 짓고 도시를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서주(西周)의 대장(大將) 윤보(尹甫)가 이 곳에 군대를 주둔하기도 한, 2700여 년의 역사를 보유한 문화의 도시이다.

명(明) 나라 때인 1370년에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서주 때의 옛 성벽에 기반해 벽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그 성벽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세월의 풍상고초 속에서도 거리와 고건물, 가게, 민가 등이 모두 명 나라 때와 청 나라 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평요는 중국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명청 시기의 고대 현성(縣城)이다.

높은 곳에서 평요고성을 내려다 보면 엄밀한 구도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정방형의 고성은 모양이 거북이를 본떠서 사람들은 평요를 일명 ‘거북이 성’이라고도 부른다.

(사진설명: 평요고성의 성문과 옹성)

평요고성의 성벽에는 남쪽과 북쪽에 성문 각각 하나씩, 동쪽과 서쪽에 각각 2개씩 해서 도합 6개의 성문을 두었다. 고성의 남쪽이 거북이 머리이고 성문의 옹성(甕城) 출구가 모두 남쪽을 향해 마치 거북이가 임의로 머리를 감출 수 있게 한 듯 하며 성문 밖의 두 개의 우물은 거북이의 두 눈을 상징한다.

북쪽 성문은 거북이 꼬리를 의미하고 동쪽으로 열린 옹성의 문은 거북이가 꼬리를 동쪽으로 뻗은 듯 하다. 이 곳은 또한 평요고성에서 지세가 가장 낮아 성안의 모든 물이 이 곳을 통해 고성을 흘러 나간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두 개씩 낸 성문은 거북이 발을 상징하는데 남쪽으로 문을 연 세 개의 옹성은 마치 거북이가 꿈틀거리며 천천히 바닥을 기는 듯 하다. 평요고성에서 동쪽 성문의 옹성만이 유일하게 남쪽이 아닌 동쪽으로 열려 있는데 이는 동쪽의 경성으로 오가는데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사진설명: 평요고성의 성벽)

명 나라 때 서주의 성곽에 기반해 쌓은 벽돌로 된 평요고성의 옛 성벽은 둘레가 6,100m에 달하고 높이는 10 m가 넘는다. 넓은 성벽의 위에도 벽돌을 깔아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다.

가운데 성벽은 구간 별로 성밖의 상황을 감시하는 초소 격인 적대(敵臺)를 쌓고 네 귀퉁이에는 키 높은 성루(城樓)를 축조했다. 외성(外城)에는 5m에 하나씩 적대를 쌓았고 환성(環城)에는 72개의 작은 적루(敵樓)와 3,000개의 성가퀴를 내서 공자의 3천명 제자와 72명의 현자를 상징한다.

평요고성에 보존된 3,700여 채의 민가는 다수가 사합원(四合院) 형식으로 되어 있다. 평요의 사합원은 중심선을 기준으로 엄격하게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며 뒤로 들어가면서 2개 혹은 3개의 마당을 거느려 한자로 ‘일(日)’자나 ‘목(目)’자형을 이룬다.

(사진설명: 평요고성의 민가)

사합원의 마당과 마당 사이에는 낮은 담을 쌓고 담에는 둥근 문을 냈으며 마당을 둘러싼 건물은 엄격하게 귀천을 나눈다. 사합원의 입구에는 벽돌 조각이 정교한 가림벽을 쌓고 처마와 기둥에도 조각물이 화려하며 기둥을 받들고 있는 돌과 돌 북에도 석각물이 즐비하다.

창문에는 순박한 기운이 넘치는 전지 작품이 가득해 평요고성의 가옥들에서는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명 나라와 청 나라 시기 건축양식과 산서의 민속문화를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평요의 한 가지는 평요가 한 때 중국의 금융센터였다는 점이다. 청 나라 때 ‘미니 북경’이라 불린 평요에는 당시 ‘천하 제일의 표호(票號)’, ‘천하와 통하는 것’으로 유명한 일승창표호(日昇昌票號)를 망라해 대 규모 은행이 여럿이나 모여 있었다.

(사진설명: 일승창 은행의 일각)

청 나라 때인 1824년에 영업을 시작한 일승창은 원래 염료업에 종사하던 평요의 한 상인이 은행업으로 갈아 타면서 설립한 은행이다. ‘뜨는 아침 해처럼 번창함’을 뜻해 일승창이라 명명한 이 회사는 중국 전역에 지사를 두었으며 심지어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도 진출했으니 그 실력을 과히 읽을 만 하다.

오늘날 평요고성의 서대가(西大街)에 위치한 일승창 표호에 들어서면 건물과 건물이 서로 연결되고 키 높은 담이 서로 마주 보면서 엄밀한 구도를 자랑해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 실력을 느낄 수 있다.

이 밖에도 평요고성에는 많은 문화재와 유적이 남아 있는데 그 숫자와 품질이 중국에서 모두 보기 드물다. 그로 인해 평요는 ‘중국 건축물의 보고’라 불린다.

(사진설명: 평요고성의 문묘)

평요고성의 동남쪽에 위치한 평요 문묘(文廟)는 당 나라 때인 620년대에 신축했다. 문묘는 가운데 문묘를 중심으로 오른 쪽의 서학(西學)과 왼쪽의 동학(東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쪽에는 세 개의 패방(牌坊)이 세워져 있다.

네 개의 마당을 거느린 문묘에는 앞에서 뒤로 가면서 영령문(欞靈門)과 대성문(大成門),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경일정(敬一亭), 존경각(尊經閣)이 차례로 줄지어 있다.

그 중 금(金) 나라 때인 1163년에 개축한 대성전은 오늘날도 기존의 모습을 유지해 중국의 여러 문묘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중국의 문묘들 중 유일한 금 나라 때 건물로 인정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평요고성)

2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보유한 평요고성에 들어서면 오래 된 박물관에 들어선 듯 하다. 오늘날도 평요고성에서는 시민들이 예스러운 민가에 살면서 일상을 유지하는데 임의로 어느 집에 들어가서 임의로 어떤 물건을 만져도 모두 백 년이 넘는 역사물이다.

평요고성에 즐비한 키 높은 담벽과 날아갈 듯 한 처마에 가득한 정교한 조각, 깊고 아늑한 마당들은 모두 과거 눈부시게 번창했던 평요의 어제를 말해주는 듯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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