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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황제 이세민
2010-09-01 12:17:01 cri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황제이다. 중국 당(唐)나라 제 2 대 황제인 이세민은 당고조 이연(李淵)의 차남이다. 이세민은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무술과 병법에 능했고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따라서 소년시절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붕괴의 기색이 짙어지자 수나라를 뒤엎기로 마음먹은 이세민은 18살 때 아버지를 설득하여 수나라를 정벌하도록 했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장안(長安)을 점령했다. 통일전쟁에서 이세민은 주요한 결책자였고 직접 군사를 통솔했다. 때문에 당나라 창건에 있어서 이세민은 실제 창건자로 추앙받았다. 당나라가 각처에 있는 군웅들을 평정하고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그가 20살 때의 일이다.

당고조가 즉위한 후 큰 아들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이세민을 진왕(秦王)으로, 이세민의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제왕(齊王)으로 봉했다. 통일전쟁이 결속된 후 황실 내에서 제왕 계승권을 놓고 투쟁이 치열했습니다. 이세민은 용맹하고 모략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수하에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를 시기한 황태자 이건성과 제왕인 이원길은 이세민을 제거하려고 했다. 한번은 이건성이 이세민을 동궁에 청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이세민은 술을 몇 잔 마시자 갑자기 배가 아파났습니다. 부축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이세민은 피까지 토했다. 이세민은 이건성에 술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인차 약을 먹고 목숨을 건졌다. 이세민은 이건성과 이원길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다. 무덕(武德) 9년 이세민은 정변을 발동해 형과 동생을 죽였는데 이 사변을 "현무문(玄武門)사변"이라고 한다. 현무문사변 후 두 달이 지나 당고조는 임금의 자리를 진왕인 이세민에게 물려주었다.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충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사심을 누르고 백성이 바라는 공정한 정치를 폈다. 이세민은 옛 원한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의견을 당면에서 제기하도록 대신들을 격려하였다. 당시의 명재상으로 불린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 명장으로 유명한 이정(李靖), 이적(李勣) 등이 이세민을 잘 보좌했기 때문에 이세민이 편 정치는정관«(貞觀)의 정치라는» 칭송을 받았고 후세 제왕들의 모범으로 되였다. 그와 신하들의 정치문답은 후에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학문과 문화를 사랑했고 전대(前代)의 왕조사(王朝史)와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을 명했는데 왕조사 가운데 "진서(晉書)"의 일부는 그가 직접 집필하였다. 이세민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좋아했는데 왕희지의 대표작 "난정서(蘭亭序)"를 사후 무덤에 넣어달라고 유언까지 했다.

당태종 이세민은 병법에 능통하고 통솔력이 뛰어난 제왕이었다. 이세민은 성채를 쌓고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키면서 적이 먼저 오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기병으로 보급로를 교란하여 군량이 떨어진 적이 퇴각하기 시작할 때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추격하는 방책을 써 설거부자, 유무주, 두건덕, 왕세충 등 군웅들을 차례로 격파함으로써 당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그가 병법에 해박하고 통솔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은 병법에 대한 담론을 수록한 "이위공 문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상편에 보면 "수나라 송로생 군사를 격파할 때 접전 초기에는 전세가 불리해 약간 물러났다가 그 후 직접 정예기병을 이끌고 적의 측방으로 돌격하였다. 그 결과 나는 송로생 군사를 격파할 수 있었다."란 기재가 있다. 이 기재에서 이세민이 전술적인 면에서는 기병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음이 나타나있고 통솔 면에서 전투 초기에 적에게 패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전세가 불리해졌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달려 나가 전세를 반전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편에는 "장수는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법을 엄하게 하여 군졸들로 하여금 장수인 자신을 두려워하게 하고 적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나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기재가 있다. 이 기재에서 우리는 이세민이 장수의 위엄보다는 군졸에 대한 사랑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세민이 "절도가 있는 군대는 무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에게 패하지 않고 절도가 없는 군대는 유능한 장수가 지휘하더라도 적을 이길 수 없다"고 한 제갈량의 말이 결코 불변의 정론은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이세민이 군의 절도도 중요하지만 장수의 역할을 대단히 중요시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세민은 "성을 얻기는 쉬우나 성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을 거울로 삼아 23년 동안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이세민은 인재를 중용하고 대신들을 직언을 받아들이며 비교적 개명한 정치를 실시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요역을 경감시키는데도 주의를 돌렸으며 생산을 발전시키는데 유리한 조치를 취한 보람으로 그가 통치한 시기에는 생산이 발전되고 사회질서도 비교적 안정되었다. 역사상 이 시기를 "정관의 통치"라고 한다. 이세민은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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