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09:24:36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6] 낙양: 모란의 고도

(사진설명: 아름다운 낙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섯 번째는 모란의 고도 낙양(洛陽)이다. 천 년의 제왕의 도시이자 열세 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낙양은 너무도 많은 왕조의 흥망과 성쇠를 기록하고 있다.

낙양은 그야말로 ‘천 년의 꿈을 꿀 수 있는 곳’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왜 “고금의 흥망사를 알려면 낙양성을 보라”고 말하겠는가. 하남(河南)성의 서부에 위치한 낙양은 낙하(洛河) 강의 양지바른 쪽에 자리잡았다고 해서 낙양이라 이름했다.

중원(中原)에 위치한 낙양은 서쪽으로 진령(秦嶺) 산발과 이웃하고 동쪽으로 숭악(嵩岳) 산을 바라보며 북쪽으로 태항(太行) 산과 인접하고 남쪽으로 복우(伏牛)산을 마주한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낙양)

지세가 험준하고 황하(黃河) 강이 가로 지르는 낙양은 예로부터 군사가들이 서로 다투는 요충지였다. 또 ‘천하의 중심지’, ‘구주(九州)의 복지(腹地)’라 불리기도 하는 낙양은 좋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역대 제왕들이 너도 나도 찾는 이상적인 도읍지였다.

기원전 2070년, 우(禹) 임금이 하(夏)나라를 세우고 낙양에 도읍을 정했으니 낙양의 도읍사와 도시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기원전 11세기, 주무왕(周武王)이 주(周)나라를 건국한 후 주공(周公)을 파견해 낙하강 기슭에 낙읍(洛邑)을 축성하게 했으며 기원전 770년, 평왕(平王)이 낙읍에 도읍을 천도하면서 낙양의 공식적인 도읍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뒤에 동한(東漢)과 위(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隨), 당(唐) 등 13개 왕조가 이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낙양은 중국에서 가장 일찍 도읍이 되고 이 곳에 도읍을 둔 왕조가 가장 많은 고도(古都)이다.

(사진설명: 낙양의 거리)

주 나라의 도읍이던 당시 낙양은 수공업이 발달해 상인들이 운집하고 학자들도 모여 들어 경제와 문화가 모두 당시의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사서에 기록된 “도성을 축조함에 성곽 한 쪽 벽의 길이가 9리이고 문을 세 개씩 냈다. 도성에는 남북 방향의 큰 길 아홉 갈래, 동서 방향의 큰 길 아홉 갈래가 있으며 모든 도로는 아홉 대의 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는 규모였다. 왕궁의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두고 왕궁의 앞쪽은 조정, 북궁(北宮)의 뒤에는 장터를 두었다”는 것을 보면 주 나라 왕성(王城)의 왕권사상과 등급관념을 읽을 수 있다.

25년에 건국한 동한(東漢)이 낙양에 도읍을 정한 후 주 나라 왕성에 기반해 대 규모 축성공사를 개시해 많은 건물을 신축했다. 당시 낙양성에는 궁성(宮城)과 관아, 화원, 시장이 있었고 도성(都城)의 성문만 해도 12개나 되었다.

낙양성의 남쪽 교외에는 당시의 최고의 명문대학이었던 태학(太學)이 있었고 또 국가 천문대인 영대(靈臺)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명당(明堂) 등 건물도 웅장하기 그지 없다. 오늘날도 낙양성에는 동한 때의 성터와 궁궐 유적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낙양의 옛 성터)

동한 후에 전란으로 인해 낙양은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어 후에 재건했으며 후당(後唐) 때 마지막으로 10여 년간 도읍이 되면서 낙양은 천 년이 넘는 도읍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도읍역사가 장안(長安) 버금으로 가는 중국 제2의 고도가 되었다.

수(隨)와 당(唐)나라 성세에 낙양은 인구가 백만 명을 넘고 사면팔방에서 공물을 받던,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가 낙양을 동양의 기점으로 하면서 낙양은 더욱 편리하게 유럽, 북아프리카,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를 진행했다.

오랫동안 번성일로를 달린 고도와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흔적이 낙양에 많은 도성 유적지와 사원, 석굴, 무덤, 비석 등 풍부하고 눈부신 문화유산을 남겼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용문석굴)

낙하강을 따라 하(夏)와 상(商), 길(吉), 한위(漢魏), 수당(隨唐) 등 5대 도성 유적지가 줄지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다. 이런 유적지에서 출토된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은 또한 당시 낙양의 번창함을 잘 보여준다.

이수(伊水) 강기슭의 바위에 축조된 용문석굴(龍門石窟)은 남북 길이가 1km에 달한다. 용문석굴은 대동(大同)의 운강(雲崗)석굴,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꼽힌다.

북위 때 효문제(孝文帝)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축조한 용문석굴은 현재 석굴 2,100여개, 불탑 40여기, 비석 3,680여 점, 크고 작은 불상 10만여 점을 보유하는데 가장 큰 불상은 높이가 17.14m에 달하고 가장 작은 불상은 크기가 2 cm에 그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백마사)

‘중국 제1의 고찰’이라 불리는 백마사(白馬寺)는 동한(東漢) 때 신축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원으로 중국 불교의 ‘본산’으로 인정된다. 전한데 의하면 동한의 한명제(漢明帝)가 금빛으로 단장한 신선이 서쪽에서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명제는 18명을 서역으로 보내 불법을 배워오게 했다. 사신들은 대월지(大月氏)국에서 천축(天竺)의 승려를 만나 불상과 불경을 받아 백마에 싣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 낙양에 사원을 짓고 백마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백마사에는 산문(山門)과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寶殿), 비로전(毗盧殿) 등 건물이 있으며 산문밖에는 하얀 돌로 된 백마 두 마리가 지켜서 있다.

(사진설명: 백마사의 백마)

백마사의 종소리를 말하는 ‘마사종성(馬寺鐘聲)’은 낙양 8경이다. 북위와 당, 송나라 때 백마사는 아주 흥성해 사원에 웅장한 건물이 즐비하고 승려는 천 명이 넘었다.

이른 아침 전각에 걸려 있는 종을 울리며 염불할 때면 은은한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경건하게 했다. 명(明)나라 때 사원에는 무게가 2,500kg의 종이 있어 맑은 소리를 냈다.

전한데 의하면 이 종은 낙양 동대가(東大街)에 위치한 종루에 걸린 종과 음률(音律)이 일치해 공명을 일으킨다고 한다. 당시 백마사의 종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종루의 종도 울려 사람들은 “동쪽에서 종을 치면 서쪽의 종이 울리고, 서쪽의 종을 치면 동쪽의 종이 울린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백마사의 종소리는 낙양 팔경에 입선되었다.

(사진설명: 망산의 고분 박물관 일각)

낙양성 북쪽의 망산(邙山)은 예로부터 황실이 차지한 풍수의 땅이어서 오늘날도 이 곳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대 황실과 귀족, 문인들의 무덤이 남아 있다.

망산은 “북망산에는 빈 땅이 없네(北邙山頭無閑土). 모두가 낙양인들의 옛 무덤이라(盡是洛陽人舊墓)”, “옛 무덤 위에 새 무덤을 파니(古墳上面起新墳) 새 무덤과 옛 무덤의 주인을 알 길이 없네(新墳古墳無定主)”라는 말처럼 무덤이 집중된, 중국 최대의 고분 군락이다.

1984년에 망산에 낙양 고분 박물관을 설립하기 시작해 1987년에 박물관이 개관했다. 낙양 고분 박물관은 중국에서 역대 무덤을 전시 내용으로 하는 최초의 전문 박물관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모란)

낙양은 내외에 이름이 자자한 ‘화도(花都)’이기도 하다. 낙양의 모란은 북송때에 벌써 온 세상이 이름을 떨쳤고 모란은 지금까지 줄곧 낙양 최고의 명물이다.

해마다 4, 5월이 되면 낙양의 곳곳에 모란이 활짝 피어나 온 도시에 싱그러운 모란꽃 향기가 넘친다. 낙양의 모란 명소로는 왕성(王城) 공원과 모란 공원, 서원(西苑) 공원 등이다.

특히 해마다 4월 12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되는 모란축제기간이면 모란을 보려고 낙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보유한 고도에 새로운 기상을 안겨 준다.

(끝)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