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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개국 황제-유방
2010-03-26 16:52:19 cri

유방(劉邦)은 자는 계(季)인데 패현(沛縣), 그러니까 지금의 강소성 태생이다. 유방은 초나라 패현의 일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장년에 이르러 하급 관리인 사수정장(泗水亭長)이 되었으며, 당시 여산(驪山)의 황제능(皇帝陵) 축조 공사에 동원된 인부의 호송 책임을 맡았다. 진(秦)나라 말기에 이르러 진승(陳勝) 오광(吳廣)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그 당시 유방은 황제 능 축조에 동원된 인부를 호송 도중 도망자가 속출하자 그도 나머지 인부를 해산시키고 도망하여 산중에 은거하던 중이였다. 진승, 오광이 농민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패현에서 소하, 조삼 등과 함께 패현의 청년들을 이끌고 패현 현감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유방이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촉나라 귀족 후예인 항량, 항우도 오늘의 강소성 오현인 오중(吳中)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 때 진나라 군대 주력은 주로 진승, 오광 농민봉기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유방과 항량이 이끄는 봉기군은 상대적으로 진나라 군대의 군사압력을 적게 받아 봉기군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얻게 되였다.

진승이 피살된 후 농민봉기군은 북원군(北援)과 서정군(西征)으로 재편성 되였는데 북원군은 항우가 인솔하고 서정군은 유방이 이끌었다. 유방이 이끈 서정군은 처음엔 군사상 별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그 후 서정군이 교통과 군사 요충지인 진류(陳留)를 공략한 뒤 대오가 장대해 졌다.

교통과 군사 요충지인 진류에 진나라는 많은 식량을 비축해 놓고 있었다. 하기에 진류 공략은 유방이 이끄는 서정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진류공략은 유방이 이끄는 서정군의 첫 대 승전이었다. 완성(宛城)을 지혜롭게 탈취한 것은 유방이 이끈 서정군의 두 번째 승전이었다. 오늘의 하남성 남양시인 완성은 당시 남양군의 소재지였고 무관(武關)을 통해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문호이다. 유방이 완성에 대해 진공을 강행하면 서정군의 진격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방은 장량의 제의에 따라 군사진공을 하지 않고 성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계략을 취했다. 마침내 유방의 계략이 성공을 거두어 완성은 유방의 서정군에게 함락되었다. 완성의 함락은 그 후의 서정군의 군사행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남양군을 취한 후 유방은 또 장량의 모략에 따라 거금으로 무관을 지키는 진나라 장군을 매수해 진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저락시켰다. 군사들의 사기가 저락된 후 유방은 군사를 이끌고 일거에 무관을 점령했다. 무관의 함락은 함양(咸陽)으로 진격하는 통로를 열어놓았다. 당시 유방이 이끄는 서정군은 10여 만 명에 달했다. 이때에 와서 서정군에 맞서 싸울 진나라 군대가 거의 없었다.

이때 북원군을 이끈 항우도 진나라 주력군대를 소멸한 후 관중으로 진격했다. 함곡관(函谷關)까지 진격한 항우는 함곡관 문이 굳게 닫혀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때에야 항우는 유방이 이미 함곡관에 입성하여 진나라 2세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당시 항우는 유방에 비해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 다. 그의 군사력 또한 유방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당시 항우는 40만 대군을 인솔하고 있었고 유방의 병력은 겨우 10여 만 명이였다. 유방이 먼저 함곡관을 함락한데 노한 항우는 수하에게 함곡관을 진공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 항우는 40만 대군으로 희하(戱下)로 진격해 나갔다. 이에 놀란 유방은 장량과 범회, 그리로 100기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가 지휘부를 두고 있는 홍문(鴻門)에 가서 항우에게 사죄했다. 사실상 유방은 아직 자기의 세력이 항우와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직접 항우의 면전에 앉아 용서를 청함으로써 (쫓겨 품안에 든 새는 사냥꾼도 잡지 않는다.)는 책략으로 자기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항우는 연회를 차려 유방을 접대했는데 이 연회가 바로 역사상 유명한 (홍문연)이다. 홍문연이 파한 후 항우는 함양으로 쳐들어가 진나라 2세 황제를 죽이고 진나라 궁전을 불살랐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초희왕을 의제로 봉하고 공을 세운 19명 수하 장수들에 토지를 나누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 유방도 한 몫이 있었다. 항우는 평성을 도성으로 하는 아홉 개 군을 차지하고 국호를 서초(西楚)로 하였으며 자신을 서초패왕으로 자칭했다.

항우는 희왕과의 약속을 어기고 유방에게 관중을 떼여주지 않고 남쪽의 한중(漢中)을 주었습니다. 이에 노한 유방은 남정(南鄭)을 도읍으로 삼고 한나라를 건국했다.

진나라가 망한 후 진나라를 반대했던 세력은 크게 두개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한나라 왕인 유방이 이끄는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서초패왕 항우가 인솔한 세력이다. 당시 위망이나 실력에 있어서 항우는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패왕으로 자처하면서 토지가 비옥한 관중을 포기했으며 이용가치가 없어진 의제를 암살했다. 본래 무장이었던 항우는 용감하기는 했지만 지혜가 없었고 정치가로서의 감각이 결핍하여 천하를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항우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관중 일대에서 세력을 늘인 유방은 한고조 2년인 기원전 205년 56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에 대한 토벌을 시작했다. 유방의 대군은 항우의 대군이 팽성을 비운 사이에 손쉽게 팽성을 함락했다. 이에 노한 항우는 3만 명의 친위대를 거느리고 팽성으로 달려와 유방의 한나라 군대를 대패시켰다. 대패한 유방은 수십 명의 기병으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형양에서 다시 재기를 꿈꾸었다.

그 뒤 4년간에 걸친 항우와의 쟁패전에서 유방은 소하(蕭何) 조참(曹參), 장양(張良), 한신(韓信) 등의 도움으로 해하(垓下) 결전에서 항우를 대파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실현시켰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정했다. 하여 유방은 한나라 왕조의 개국 황제로 되었다.

유방은 비록 서민 출신이었으나 성격이 대담하고 치밀하며 포용력이 있어 부하들을 활용하는 데 능숙하였으므로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방은 왕위에 즉위해서 8년 만에 장락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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