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왔어요]
남: 편지왔어요, 오늘은 연길의 김금옥 청취자가 보내준 편지로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3.8여성의 날을 계기로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그리며 적어보낸 편집니다. 지금 함께 들어보시죠.
"생활의 강자였던 나의 시어머니—김숙자 어머니를 그리며"
김숙자 어머니의 애명은 "뒷방내"였습니다. 그러다 해방 후에 김숙자라고 새 이름을 지었습니다.
김숙자 어머니의 고향은 길림성 연변 안도현 약수촌입니다.
18살에 시집가서 20살에 아들 강수원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들애가 8살 나던해, 남편이 뜻밖에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김숙자 어머니는 의지가지 없는 두메산골에서 청춘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해 김숙자 어머니는 28살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청천벼락과도 같이 하루아침에 생과부가 되어버린 김숙자 어머니는 살길이 막막했으나 굳은 마음으로 묵밭에 감자를 심어 주식으로 삼고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허나 아들이 공부할 곳이 없었고 초갓집 마저 비가 오면 지붕이 샐 만큼 가난하고 청빈해 살길이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다만 아들 강수원을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그곳을 떠났습니다.
포대기 같은 이불 하나 이고 아들애를 앞세우고 산길을 걷다보니 날은 저물었습니다.
아들애는 배가 고프다며 땅에 주저 앉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뱀이 온다며" 아들을 재촉하며 밤이 깊어서야 겨우 청구동 본가집의 문고리를 잡게 됐습니다.
웬 보따리가 들어오니 부모님은 반갑다기 보다 어색해 했고 병석에 누워있던 올케만은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애는 엉덩이가 온돌에 닿자 마자 골아 떨어졌고 어머니는 물 한바가지를 들이키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 듯 싶었다고 합니다.
이때로부터 김숙자 어머니는 이름모를 머슴 살이를 시작했고, 그래도 좁쌀 밥에다 된장국은 먹을 수 있었고 아들을 학교로 보내 공부시킬 수 있게 되어 고생이 아니라 낙으로 생각하고 모든 가사를 도맡아 가며 8명이 함께 지냈다고 합니다.
김숙자 어머니는 이 온 집식구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항상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이렇게 살다보니 딴 생각이란 할 새가 없었습니다. 겨울이면 명월구 시장에 가서 동태를 사서 지니고 와서는 마을에서 쌀과 바꿔, 또 그것을 지니고 시장에 나가 동태로 바꿔가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아들의 학비와 공책, 연필을 마련하군 했습니다.
강수원군도 외갓집이지만 눈치밥 먹으며 공부도 잘하고 커가면서 여름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소꼴을 베어오군 했답니다. 강수원군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 했지만 돈이 넉넉치 못해 연길 사도학교에 입학해 해방 전에 졸업하고 안도소학교 교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해방 후에 연길민족학원 고급반을 졸업하고 연길시 중학교의 역사교원으로 근무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어머니는 아들이 연길시 중학교 부근에 배치받은 두칸짜리 자택집에서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젋었을 때 고생은 늙어서 황금주고도 못바꾼다며 행복에 겨워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구나"하시면서 점점 젊어지셨고 이웃과도 아주 사이좋게 지내셨습니다.
1950년 말 강수원군은 저와 결혼식을 올리게 됐고 입당까지 했으며 맡은바 일도 잘해 나갔습니다. 그때 당시 저는 연변인민방송국의 방송원으로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방송원인 며느리를 보았다며 동네방네 자랑하셨고 저를 딸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셨습니다.
김숙자 어머니는 청춘과부로 갖은 고생을 다하시면서, 아들을 중학교장, 연변대학 공학원 원장으로 길러냈습니다. 강수원씨는 우수공산당원 칭호도 수여받았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며느리인 제가 임신을 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에 이혼을 해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머니는 이혼이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저를 감싸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한밤에 저희 집 문앞에 버리고 간 갓난 여자애를 어머니가 친 손녀처럼 길러주셨고 저더러 숙원풀라며 대학 공부를 하게 지원해 주셨습니다.
김숙자 어머니는 또 찰옥수수죽이며 초두부 등 각종 맛나는 음식들을 해놓고 저의 친구들까지 집에 불러들여 초대하시면서 저를 끔찍히 아껴주셨습니다.
지금도 저의 친구들은 그때 그 맛이 생각난다며 저의 시어머니를 높이 평가하군 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반찬이나 음식들은 아무리 제 맛이 아니어도 종래로 나무람할 때가 없었습니다. 나이들면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라며 고무해 주었습니다.
애지중지 길러준 손녀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김숙자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그해 어머니는 78세였습니다.
저의 친정어머니는 저를 보실 때마다 "너의 시어머니같은 사람은 정말 만에 하나도 없다면서 항상 잘 모시라"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습니다.
김숙자 어머니께서 애주중지 아껴오던 손녀는 지금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 간부로 일하고 있으며 증손녀는 안휘공업 중점대학 법학계를 졸업하고 올해 1월 북경대학 법학계 연구생 시험을 치렀습니다.
김숙자 어머니는 청춘과부로 아들을 잘 키웠고 그런 훌륭한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란 손녀에, 지금은 증손녀까지 모두 대학에서 입당하고 당지부서기, 우수학생으로 활약했습니다.
김숙자 어머니의 고생살이, 자식 키운 자랑, 며느리를 감싸며 딸처럼 사랑해 주신 어머니의 넓은 흉금, 손녀를 잘키워 아들과 며느리에게 후대를 남겨주신 김숙자 시어머니의 자랑거리는 많고도 많습니다.
저는 언제나 시어머니의 자랑을 필로 현대 시어머니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시어머니에게 보답해 드리지 못해 후회가 막심해 오늘 이렇게 필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글로 세상 뜨신 시어머니에게 감사드리며 어머니께서 고이 잠드시길 빕니다.
김숙자 어머니의 며느리—김금옥 드림.
남: 김금옥 청취자의 편지 사연 감명깊게 잘 보았습니다. 김숙자 어머니가 살아오신 길, 정말 한편의 드라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숙자 어머니, 또한 며느리를 항상 감싸주며 딸처럼 아껴왔던 김숙자 어머니, 그 넓은 아량을 존경합니다.
여: 그렇습니다. 방송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도 아마 공감이 가리라 생각됩니다. 김숙자 어머니처럼 평생동안 꾸준히 박애정신을 실천해 간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닌데요, 그래서 더 존경스럽습니다.
남: 앞으로 보다 많은 분들이 이와 같은 감동적인 사연, 귀맛좋은 사연, 나만의 이야기들을 편지나 이메일로 적어보내주시길 바랍니다.
녜, 그럼 계속해 다음 편지 사연 전해듣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