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그럼 이번 순서에 지난 5월 12일 어머니의 날을 계기로 연변의 손화섭 청취자가 작성해 보내주신 글을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 <나의 아버지, 어머니>
"어머니날"을 맞으면서 "어머니날"의 유래를 재삼 다시 학습하면 서 나에게 생명과 육체를 주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웹스터라는 곳에 독실한 여성 안나 자 아비스가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홀몸이 된 그녀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동안 좀 더 효도를 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을 파티에 초대했을 때 그녀는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참석했답니다. 그녀는 이 세상 사람들이 일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어머니를 기억하게 되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어머니의 유산 10만달러로 기금을 만들어 "어머니날"을 제정할 것을 국내외에 탄원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나 윌슨 대통령 취임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1914년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을 처음으로 "어머니날"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되여 세계 여러나라는 물론 우리 중국에서도 "어머니의 날"에 어머님께 효성하는 열풍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5월12일"어머니날"을 맞게 되면서 내가 71세가 되였지만 나 에게 생명과 육체를 주신 거룩하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욱 그리게 됩니다. 소년시절에는 미래를 위해 살고 청년시절에는 리상과 희망을 위해 살며 중년시절에는 성취와 보람으로 살고 로년시절에는 추억으로 살면 서 "제2의 인생"을 엮어간다고 할수 있습니다.
나는 71세가 되였지만 아버지를 의연히 추억하게 되고 그리워진다. 내가 6살 나던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살 때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큰 인상은 없지만 제가 10살때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아야 한다면서 제때에 하나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나는 9살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이미 우리말 문장을 줄줄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붓글씨를 잘 쓰시는 자기의 친구 리병기 로인에게 부탁하여 나에게 백지로 "천자문"책을 만들어주셨습니다. 한페지에 16자씩 꽉 씌여져 있는 천자문을 나더러 밤이면 이불 속에서 하늘천, 따지, 가물현, 누를황 등등 하면서 외우게 했고 낮이면 낮다란 나무상자에 좁쌀을 담아놓고 깍아만든 싸리꼬챙이로 한글자를 쓰고는 흔들어 지우면서 글씨쓰기 연습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한어문학습에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내가 9살때부터 24절기도 배워 주었는데 립춘, 우수, 경 칩, 춘분, 청명, 곡우, 립하 등등 그때 배우고 외운 24절기를 나는 지 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공부에 명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에 나 는 책을 읽기 시작하면 곁에서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정력을 집중했습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10살때인 소학교 2학년때에 돌아가셨 지만 그전에 언녕 나에게 아버지의 고향은 황해도 곡산군이라고 알려 주셨으며 나는 용신향 양목촌에서 태여났다면서 우리의 본은 밀양손 씨라고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선량하고 성실하고 무던한 마음씨는 나에게 깊고도 커 다란 인상을 주었는데 나에게 늘 사람은 선량한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타일러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광복 전과 광복 후에 조선땅과 중국땅에서 25년간 탄 광로동자로 고되게 일하셨는데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된후 아버지와 같이 탄광일을 하신 유운선 로인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유로인은 아버지와 친형제처럼 지내셨다고 하시면서 나의 아버지는 선량하고 무던하고 일 잘하셨는데 미더운 분이여서 뭇사람들을 진심으로 도와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나는 유로인에게 사과 5근과 돼지고기 5근을 사다드리고 아 버지를 만난것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유로인에게 공손한 절을 올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후 농사를 짓는 한편 매돌도 만들어 팔고 싸리로 삼태기와 광주리도 결어 팔기도 했는데 동네이웃들에게 무상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의 계모가 들어오기전에 몇해간을 홀로 사시면서 나를 키웠는데 가난속에서도 꾸준히 일해 나에게 맛나는 대추, 밤, 곶 감, 물만두 등도 다 사먹이면서 아들애의 교양도 착실히 하면서 아버지 노릇, 어머니노릇을 다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착하고 선량하고 근면하신 이미지는 언제나 추억으로 남아있어 나의 여생에 까지 본보기로 되여주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또 영원히 잊지못할 그리운 양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나는 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0살에 아버지까지 별세하시는 바람에 외롭게 혼자 남게 됐습니다. (친척하나 없는 혈혈 단신이였습니다.) 다행히 마을 지도부의 소개로 남편이 사망하고 자식하나 없이 홀로 계시던 한춘화라는 할머니벌 되시는 분(당시 1952년 52세였음)이 나를 양자로 데려다 정식으로 수양하게 됐습니다. 양어머니는 당년에 나까지 도합 아이 다섯 이나 데려다 길러주셨습니다. 양어머니는 제일 처음으로는 태여난지 여덟달 되는 채오금을 데려다 애지중지 키워 시집까지 보내주었고 먼 조카벌 되는 친척집의 두 남매인 원영희와 원덕 길이를 데려다 정성스레 키웠으며 외손자 즉 양딸 채오금의 아들 김영 호도 데려다 키워주셨습니다. 그러던 중 1952년에 내가 양아들로 가서 함께 살게 됐습니다.
이렇게 한춘화 어머님이 가난 속에서도 다섯 아이들에게 몰부은 그 지극정성은 하늘같이 높고 바다같이 깊었습니다. 그후 외손자 김영호도 자 기 부모한테로 가게 됐습니다.
양어머님은 언제나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참된 사람이 되라고 일깨 워주셨습니다. 1964년2월12일 나는 한 마을에서 일하면서 정이든 리정자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마음씨 착하고 일잘하고 무던한 나의 안해는 양어머님을 친정어머님처럼 공손히 대했으며 늘 어머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무슨일이나 물어보면서 처사하였기에 양어머님은 매우 만족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어머님을 모시고 당시 농촌에서 탈곡 장이거나 우사칸에서 상영하던 영화구경도 다녔으며 어머님이 반가와 하시는 물고기와 돼지고기도 가끔 가다 사서 대접하군 했습니다.
한번은 양어머님이 위장병으로 고생하시다가 용신향병원에 입원했 었는데 병이 위급하여 먼 친척들과 딸, 사위까지 오고 의사와 간호사들 도 이 병이 나을것같지 않다며 퇴원하라고 권고했지만 우리 부부는 결 연히 결단을 내리고 계속 입원치료를 하면서 치료비를 구해 대였기에 그때 양어머님은 병이 완쾌됐지만 그후 3년이 지나 76 세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당시 우리 양아들, 며느리의 약간한 효성이 작용 했던지, 장례식 때 생산대에서 꽃다발을 만들어오고 제사상을 차려왔으며 공사(지금의 향)와 농전소, 림산작업소, 우전국, 향병원에서까지 제 사상을 차려왔었습니다.
젊어서 고독하게 홀로 지내시던 양어머님, 고난에 시달리면서도 남 의 자식 다섯이나 친자식처럼 길러주신 거룩하신 양어머님, 또 우리의 세딸까지 학교갈 나이까지 다 길러주신 양어머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 을것 같지 않다. 하지만 단 하나의 불효가 있다면 생전에 잘 모시면서 효성하지 못했고 어머님을 모시고 사진 한장 찍어남가지 못한 것이 참 유감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용신향에는 사진관하나, 사진사 한명이 없었기에 룡정에 가아먄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나도 인젠 71세의 로년에 들어섰지만 양어머니의 바다같이 넓고 깊은 사랑만은 가슴깊이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평범하시고도 위대하신 양어머님, 고이고이 잠드십시오.
남: 방금 지난 5월 12일 어머니의 날을 계기로 낳아주신 부모님들,그리고 지극한 정성으로 자신을 포함해 많은 어린이들을 훌륭하게 키워주신 양어머님을 그리며 적어주신 글 감동깊게 잘 보았습니다.
여: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5월 12일은 어머니의 날, 5월 15일은 세계 가정의 날이었습니다. 달력에 들어있는 어머니의 날과 가정의 날은 오직 하루로 적혀있지만 부모님에 대한 효도,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하루에 그치지 않고 일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 그렇죠. 특히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데요,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대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부모님의 건강을 지켜드리는 것이 자식들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여: 방송을 듣고 계시는 모든 분들의 가정의 화합을 기원하면서 다음 소식 만나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