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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패왕 항우
2010-04-26 09:47:07 cri

항우(項羽)는 이름이 적(籍)이고 자는 우(羽)이다. 기원전 232년 항우는 초(楚)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항량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소년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봉기가 일어난 진나라 말기에 그는 숙부 항량과 함께 강동에서 거병했는데 기원전 208년 항량과 항우가 이끄는 병력은 6만 여명에 달해 진나라를 반대하는 반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후에 항량이 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기원전 206년 항우는 회왕을 의제(義帝)로 삼고 여러 제후들을 봉한 후 스스로 자신을 서초패왕(西抄覇王)라 칭했다.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 수도 함양을 공략하는 대 출정에 나서게 되었다. 초회왕은 여러 장군을 독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누가 먼저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면 그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

항우는 북쪽에서, 유방은 남쪽에서 각기 출진했는데 항우는 장감이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 20만을 거록 전투에서 궤멸시켜 천하에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막상 함양에 먼저 당도한 사람은 유방이었다. 뒤늦게 관중에 다다른 항우는 먼저 함양을 점령한 것이 유방임을 안후 그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항우의 군사는 40만 명, 유방의 군대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만일 양군이 전투를 벌인다면 유방의 군대가 패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냉철한 유방은 현실을 직시하고 수치를 무릅쓰고 항우를 찾아 홍문에 가서 사죄했다. 항우의 모사인 범증은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자객에게 명해 검무를 추게 하면서 유방을 죽이려고 했다. 유방의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장량이 유방의 호위 무장인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쾌는 됫박만한 술잔으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칼로 쓱 베어서는 모조리 먹어 치운 다음 유방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그를 죽이고자 하는 항우의 처사가 너무나 용렬하다고 질책했다. 항우가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필사적으로 탈출해 위기를 모면했다.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에서 유명한 "홍문연"이다.

함양을 장악하게 된 항우의 처사는 유방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미 항복한 진왕 영을 죽이고 함양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궁궐을 불사르고 여산 능을 파헤쳐 재화를 획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모처럼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한 항우의 처사를 빗대어 한생은 "마치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과 같다"고 비웃었다.

관중 지역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비옥한 평야 지대로 일찍이 서주와 진나라가 일어났던 거점이자 경제적 기반이었다. 뒷날 유방의 모사 소하는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유방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주는 커다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관중에 확고한 근거지를 두고 든든한 후방을 확보한 것이다.

한편 항우는 초나라의 후예로서 초를 멸망시킨 진나라에 복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며 역사를 되돌려 진나라 통일 이전의 사회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공신들에게 전국을 분봉했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그의 영토분배는 매우 무원칙한 것이어서 커다란 불만을 샀다. 제후 왕들의 불만은 각지의 반란을 초래해 그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특히 척박한 땅을 분봉 받은 유방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때마침 항우가 초의 의제를 살해하자 명분을 얻은 유방은 행동을 개시했다. 하여 항우와 유방 즉, 초나라와 한나라 사이의 3년이 넘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항우는 대결에서 거듭 승전을 거두었으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보급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후방 기지 건설에 실패한 항우는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많은 인재를 잃었다.

원래 유방의 명장 한신도 항우의 휘하였는데 그를 얻은 유방은 위기를 극복하고 항우에게 반격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마침내 해하, 지금의 안휘성 화현에서 겹겹이 포위된 항우의 군사는 10여만 명이였고 유방의 군사는 30여만 명에 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의 진영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왔다. 여기서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들려오는 초나라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항우는 "어느새 고향 사람들까지 한나라의 군대가 되었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고는 한밤중에 주연을 베풀고 자기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장수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다. 비감한 심정에 빠진 항우는 한밤중에 애마인 우추마와 애첩인 우미인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었건만 때가 불리했도다. 우마추도 달리지 않는구나. 우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인가."

항우는 20여명 군사와 함께 간신히 해하의 포위를 뚫고 남쪽 초나라를 향해 도망가다가 오강기슭에서 유방의 군사에 의해 또 포위되었다. 이때 오강의 정자 부근에서 배 한척이 기슭으로 다가오더니 배사공이 항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강 동쪽을 지방이 작지만 그래도 땅이 천리에 이르고 백성이 몇 십 만이니 그곳에서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 있고 지금의 고비를 넘기면 다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고자 하는데 내가 강을 건너서 무었하리. 이제 나 홀로 살아 돌아가면 강동의 사람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다시 왕으로 추대한다 해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리오."

그러곤 항우는 칼로 자기의 목을 쳐 목숨을 끊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다시 중국을 통일했고 그 왕실은 4백년 이상 유지됐다. 유방의 궁극적 승리는 항우와는 달리 인재등용을 중시하고 백성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가능했지만 그와 반대로 항우는 난폭하고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기에 때문에 초반의 승리를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자멸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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