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풀이
"一丘之貉"이 성구는 하나 일(一)자에 언덕 구(丘)자, 어조사를 나타내는 지(之)자에 너구리 학(貉)자로 이루어 졌다.
조선어 번역
같은 산속에 있는 담비라는 말로서 같은 짝패임을 비겨이른다. 그놈이 그놈이다, 꼭같은 놈들이다. 한짝이다는 뜻으로 쓰인다.
주의할점은 "貉"를 (luo)거나 (hao)로 읽지 않는다.
유래
고대사회에서 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필연코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양운(杨恽)은 소제(昭帝)때 승상으로 지낸 양창(杨敞)의 아들이며 사마천(司马迁)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사마천: 사기(史记)의 작가)
소제때 막강한 권력으로 천하를 통치했던 것은 곽(霍)씨가문 일가였고, 고관대신들은 서로 아첨하기에 바빴다. 그때 조랑(曹郎)직을 맡고 있던 양운은 더 높은 관직을 원하지 않을지언정 곽씨가문에 아첨하기를 거부했던 바른 사나이었다. 곽씨가문의 죄를 적발할 때 공로가 컸던 점을 인정받아 양운은 평통후(平通侯)로 책봉, 광록경(光禄卿)으로 직위가 올라갔다.
양운은 매사에 신중하며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했고 종래로 뢰물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성격이 남달라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끼쳤다. 양운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늘 자기자랑을 했으며, 사람들은 이로 인해 불쾌해하면서도 체면때문에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겉으로는 공경하는체 하면서도 실제로는 꺼리어 멀리했다. 양운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뿐더러 늘 다른 사람을 자신과 비기면서 가혹하게 요구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다른 사람의 사적인 비밀을 폭로하기 즐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운에게 개인적인 비밀을 폭로당했던 사람들은 뼈에 사무치게 그를 증오하게 됐다.
양운과 태복사경인 대장락(戴长乐)은 원래부터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한번은 고소를 당한 대장락이 분명 양운의 짓일 것이라 의심하고 옥중에서 양운을 비방하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
"양운은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고관들을 무시하며 사석에서 황제를 못난 군주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의 군주는 대신들이 제기한 좋은 방법들로 나라를 다스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총애하는 소인들을 기용하여 결국 멸망에 이른 것처럼 이런 현상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거늘, 고대의 황제나 지금의 황제나 한 언덕에 모여사는 너구리와 다를바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신하된 자로서 할 말이 아니옵니다"
이것을 본 선제는 화가 나 양운을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양운의 공을 생각해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면직시켰다.
"一丘之貉"라는 성구는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서로 다를바 없는 똑같은 부류, 같은 짝패임을 비겨이른다.